일치되게 하는 비결
빌립보서 4장 2-7절 2014/10/8(수)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교회가 처음으로 성경에 등장하기 시작한 곳은 사도행전 16장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유럽의 첫 관문인 빌립보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 했을 때 사도 바울은 전혀 예상치 못한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의 명령에 이끌리어 행한 복음 전도였지만 여건이 녹녹치 않았습니다.
소아시아와 달리 디아스포라 유대인 정착촌이 형성되지 않은 신도시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아주 큰 부담이었고 모험이었습니다.
이미 복음이 증거 된 토양에서 복음을 증거 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은 했지만 그것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유럽에서 맞는 첫 번째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안식일이 되자 바울과 실라는 안식일을 지킬만한 회당을 찾아 이곳저곳을 방황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어디서도 안식일을 지킬만한 회당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 대신 뜻 밖에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자색 옷감장사 루디아입니다.
루디아, 자색 직물 산업으로 유명한 두아디아(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있었던 곳 중에 한 지역) 출신입니다. 두아디아 출신답게 루디아는 빌립보 성내에서 고급 옷감인 자색 옷감장사를 통해 많은 돈을 벌게 됩니다. 그가 이방여자인지 아니면 유대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 루디아에게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고, 그의 온 가족이 세례를 받음으로 루디아의 집은 유럽 선교의 첫 번째 거점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교회가 빌립보교회입니다.
이것을 사도행전 16장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6: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6: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이처럼 유럽 전도의 전초기지인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라는 한 가정에서 처음으로 시작되게 됩니다. 지금처럼 번듯한 건물에 간판을 달고 십자가를 세우고 교회를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루디아라고 하는 한 가정으로부터 출발하게 됩니다. 이는 빌립보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초대 교회가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는 우리나라 초기 선교 역사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특히 강화 선교의 역사를 보면 이런 특징이 아주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강화 선교의 첫 관문인 교산교회 그리고 강화의 안디옥 교회라고 하는 홍의교회, 이 모든 교회가 루디아의 가정처럼 헌신된 한 가정으로부터 믿음의 역사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게 됩니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서 몇 년 전부터 건물 없는 교회의 모델로 가정교회 사역을 시작한 분이 방선기 목사님입니다. 이랜드 사목으로 또 직장사역연구소의 소장으로 한국교회 안에서 아주 활발하게 활동했던 분이 방선기 목사님인데, 그런 그분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직장사역을 중단하고 가정교회에만 전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초대교회의 모든 교회가 예외 없이 주님을 영접한 한 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동, 서양할 것 없이, 예나 지금이나 이 원칙은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주님을 영접한 한 가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선교의 제1원칙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6장 31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16: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이것이 그리스도교 선교의 제일 원칙입니다.
따라서 믿는 성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선교적 과제는 공동체로서의 우리 가정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몸 된 교회로 우둑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쉽지 않습니다.
자녀가 부모전도하기 쉽지 않구요. 부모가 자녀 교회 인도하기 쉽지 않구요. 형제가 형제 전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속한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 가정에 대한 선교적 과제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선택사항이 아니라 절대명제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것을 놓고 늘 기도해야합니다.
1년이든 10년이든 30년이든 반드시 이 묵은 숙제를 놓고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면 응답은 반드시 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죽은 자의 가르침이 아니라 산자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반드시 응답은 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가정이 교회와 같은 가정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니 남편의 영혼구원을 위한 기도, 자녀의 영혼구원을 위한 간구, 그리고 형제자매를 위한 영혼구원의 기도를 멈추지 마시고 계속해서 기도를 이어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처럼 루디아의 가정으로부터 시작된 빌립보 교회는 날마다 부흥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유럽 선교의 전초기지가 되면서부터 아주 중요한 선교적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특히 로마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
그런데 그런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이 떠난 이후 아주 큰 시험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성도 간에 벌어진 시기와 질투입니다.
시기와 질투, 사람의 이 완악한 성질이 문제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지 못하고 자기 성정에 따라 완악함을 부리는 빌립보 교인들의 고집스러운 성질이 빌립보교회에 임하게 됩니다. 무서운 시험이지요.
그러니 항상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도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당장 찾아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지만 그럴 만한 처지도 아니고 그래서 빌립보서라는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결론부분에 해당하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시기와 질투라는 완악한 성질에 빠진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이런 구체적인 처방을 내립니다.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다시 반복하는 이야기지만 첫째는 무엇보다도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어찌했든 간에 우리는 ‘필라델피아, 형제애’를 가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같고 근원이 같고 아버지가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야 된다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은 만만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반드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열로 가득한, 시기와 질투라는 완악한 성질에 빠진, 빌립보 교회의 위기를 구할 수 있는 바울 사도의 처방입니다.
요즈음 한국교회가 아주 몸살을 알고 있습니다.
빌립보교회와 같은 시기와 질투, 완악한 성질에 빠져 분쟁하는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세상의 뉴스(가십) 거리가 될 정도로 아주 심각한 수준입니다.
그들의 행동을 보면 세상보다 더 치사할 정도로 아주 유치한 수준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이런 시험에만 직면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위기의 원인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기와 질투, 완악한 성질을 수수방관만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시험은 우리 교회도 예외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시기와 질투, 완악한 성질은 모든 교회가 노출된 시험거리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어떻게 찾아야하는가?
바로 빌립보서 4장 2절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교회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 중에 하는 멍에를 같이 지는 것입니다.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말이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입니다.
동역자이지요.
나와 함께 항상 복음 전도에 힘쓰던 동역자를 뜻합니다.
멍에를 같이했다는 것은 서로 서로가 협력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온전한 구원과 성숙을 위해서 협력자로 파라클레도스의 성령이 내주 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복음전도와 교회를 위해서 서로 서로가 협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시기와 질투로 가득한 교회의 상처가 치유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방법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관용을 베푸는 것입니다.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관용이 무엇입니까?
상대방의 처지를 헤아려 배려하는 마음이 관용입니다.
그래서 항상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마음이 바로 관용입니다.
이 관용의 마음으로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교회의 문제는 인간의 성정, 곧 시기와 질투라는 자기 성질에서 시작됩니다. 아주 사소한 문제이지만 그 파괴력은 아주 대단합니다.
그러면 이 시험을 어떻게 극복한 것인가?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3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을 것.
두 번째는 멍에를 같이 질 것.
복음의 멍에 교회의 멍에를 같이 지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서로서로 관용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가 이런 마음과 이런 생각을 이룰 수 있도록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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