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
빌립보서 4장 1절 2014/ 9/24(수)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처음 교회에 오시는 분들이 가장 남감하게 여기는 것 중에 하나는 교회 안에 있는 분들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입니다.
세상에서는 ‘형님’ 이라든가, 아니면 ‘사장님’ 그러면 다 통하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누구를 집사로 부르고 또 누구를 권사로 불러야하는지 참 나감한 것이 호칭의 문제입니다. 세상에서는 적당히 봐서 나이가 있을 것 같으면 ‘형님’하면 그만이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집사, 권사, 장로라는 호칭이 나이순도 아니고 참 난감합니다. 그래서 집사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권사라고 불러야할지 도대체 감을 못 잡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 분들에게 ‘형제님, 자매님’ 그러면 그분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까무러치는 것입니다.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밑도 끝도 없이 ‘형제님 자매님’ 그러니까 교회는 경우도 없고 위아래도 없는 것처럼 오해를 살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파되었을 때 양반계층으로부터 복음이 외면된 것도 바로 이러한 호칭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부르면서 이런 호칭을 사용합니다.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형제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엄연히 민족이 다르고(바울-아시아, 빌립보-유럽) 혈통이 다르고 족보가 다르지만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형제들’이라고 지칭합니다.
형제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말한 형제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이 오늘 저녁에 나누고자 하는 말씀의 핵심 내용입니다.
우선 예수님이 말씀하신 형제에 대한 정의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2장입니다.
12: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12: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12: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12: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누가 우리 주님의 형제입니까?
혈통으로서의 형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
곧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자.
그가 곧 주님의 형제입니다.
이러한 형제의 정의를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있어서 형제란?
‘주 안에서’거하는 모든 사람입니다.
‘주 안에서’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한 형제의 전제조건입니다.
따라서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에게 붙일 적당한 호칭이 없다고 해서 무조건 ‘형제님 자매님’ 이라고 부르는 것은 좀 재고해볼 사항입니다.
그냥 ‘ ---씨’ 그러는 것이 실은 바람직한 호칭입니다.
하지만 ‘---씨’그러는 것이 왠지 세속적인 것 같고 ‘형제님 자매님’그렇게 불러야 거룩한 것 같고 무엇인가 다른 것 같아서 그러는데 실상은 아닙니다.
더욱이 주 안에 거하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호칭입니다. 왜냐하면 ‘형제님, 자매님’이라는 호칭에는 반드시 전제 조건이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이름이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장로, 목사보다 더 귀한 호칭이 형제자매라는 호칭이고 성도의 호칭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바라기는 주 안에 한 형제요 한 자매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처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형제라는 호칭은 최고의 호칭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를 마무리하는 4장 1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서 말하기를 ‘형제들’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만큼 그리스도라는 기준이 철두철미했던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런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형제들’이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호칭을 덧붙입니다.
다시 본문을 봅니다.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형제들이 곧 사랑하는 자이고, 사랑하는 자가 곧 형제들이라는 말입니다.
호칭의 표현만 다르지 실은 같은 내용의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형제와의 사랑.
이것을 바울은 계명의 완성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율법의 핵심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형제애로 나타난다고 본 것입니다.
헬라어로는 '필라델피아'라고 합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지요?
미국 펜실베니아주에 있는 항구도시가 '필라델피아'입니다.
우리에게는 '필라델피아 크림치즈'로 더 잘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그 뜻이 무엇인가 하면 ‘형제애’입니다.
'아델포스', '형제'라는 말과 '필리아' '사랑'이라는 말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가 ‘필라델피아’ ‘형제애’입니다.
‘필라델피아’,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필라델피아, 형제애’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부모에게서 태어나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나야 한다.’
근원적인 뿌리가 반드시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라델피아 ‘형제애’, 이 호칭이 주는 가장 큰 목적은 하나가 되는 것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뿌리의 근원이 서로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뿌리의 근원이 같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혈통이 다르고 관습이 다르고 성품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러니 ‘필라델피아, 형제애’가 있다고 하면서 교회공동체 안에서 서로 비판하고 서로 날선 대립을 한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부르면서 ‘필라델피아, 형제애’라는 호칭을 사용한 이유는 관계의 영원성 때문입니다.
일시적인 관계가 아니라 영원한 관계로서의 형제애를 강조합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처럼 ‘필라델피아 형제애’는 영원불변한다는 것입니다.
내 감정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그런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원 불면하는 절대적 사랑의 관계가 ‘필라델피아 형제애’입니다.
반면 세상은 어떻습니까?
말이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지 정말 영원한 해병입니까? 아닙니다.
얼마든지 헤어지고 깨어지는 관계가 인간의 관계입니다.
이는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이고 피를 나눈 형제지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관계를 인연이라고 불교에서는 부르는 것입니다.
인연, 원인과 결과로 맺어져야만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한 ‘필라델피아 형제애’는 상대적 관계가 아니라 절대적 사랑의 관계입니다. 즉 인간관계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말미암은 관계 맺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필라델피아 형제애’의 관계는 절대성을 가지고 있고 불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누구 안에서요? 영원하신 주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마지막으로 ‘필라델피아 형제애’는 같은 기업(基業)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 관계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라는 기업을 유산으로 받은 공동체로서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 ‘아버지’입니다.
왜 우리 모두가 아버지라고 부릅니까?
그 아버지로부터 받을 기업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하게 유업으로 받았다는 뜻에서 ‘필라델피아 형제애’를 바울은 사용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우리는 한 하나님 한 아버지를 뿌리를 두고 있는 한 형제, 한 자매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서로 투기와 분쟁으로 일삼고 다툼이나 허영으로 살아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누누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2: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바라기는 이러한 ‘필라델피아 형제애’가 우리 안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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