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아는 길
빌립보서3장 10-11절 2014/8/27(수)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3: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여호수아와 그 이름의 뜻이 같은 여호수아의 축약형인 호세아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앞두고 아주 의미심장한 말 한 마디를 북 이스라엘을 향하여 던집니다.
호세아 4장 6절입니다.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4:7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새번역성경입니다.
4:6 내 백성이 나를 알지 못하여 망한다. 네가 제사장이라고 하면서 내가 가르쳐 준 것을 버리니, 나도 너를 버려서 네가 다시는 나의 성직을 맡지 못하도록 하겠다. 네 하나님의 율법을 네가 마음에 두지 않으니, 나도 네 아들딸들을 마음에 두지 않겠다.
4:7 제사장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에게 짓는 죄도 더 많아지니, 내가 그들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겠다.
호세아는 남 유다 출신의 예언자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동족인 북이스라엘의 죄악상을 가만히 지켜 볼 수만 없었습니다.
특히, 수도 사마리아와 그리고 벧엘에 있는 왕립 성소의 제사장들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가나안의 다산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는 것을 가만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남편처럼 섬겨야할 이스라엘이 지금 여호와가 아닌 다른 남편을 섬기는 것은 곧 음란한 행위니 이를 멈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범죄를 멈추지 않자 결국 앗시리아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이 일이 호세아 선지자 때 벌어집니다.
이를 두고 호세아가 한 예언의 말씀이 ‘내 백성이 나를 알지 못하여(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음란한 행위의 원인이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온다고 호세아는 진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한 무지는 단순히 무지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상 숭배라는 거짓되고 음란한 행위로 까지 이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대한 무지의 죄가 음행이라는 악을 양산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호세아의 이 예언, 얼핏 이해할 수 없는 예언이었지만 이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하는 일 마다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는 악한 짓만 골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약성경 곳곳을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패역한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과 율례를 들으려 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정성껏 드리는 제사만 받으시고 우리 생활에는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태도였습니다. 신앙과 생활의 불일치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그릇된 신앙의 형태를 예수님은 마가복음 12장에서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해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비유를 보면 주인으로부터 자비를 얻은 악한 포도원 농부들이 결국 어떤 선택을 합니까?
포도원 주인이 보낸 아들까지 죽입니다.
주인에 대한 영접이 아니라 거부이지요.
우리 삶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한 포도원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 자신을 예표 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말하고 싶은 것은 육체를 입고 오신 곧 독생하신 하나님을 너희가 지금 기쁨으로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고 배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대한 무지, 하나님에 대한 망각은 무서운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망각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거부, 불신앙으로 이어지는 악함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가만 두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지자인 호세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 하신 것입니다.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4:7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새번역성경입니다.
4:6 내 백성이 나를 알지 못하여 망한다. 네가 제사장이라고 하면서 내가 가르쳐 준 것을 버리니, 나도 너를 버려서 네가 다시는 나의 성직을 맡지 못하도록 하겠다. 네 하나님의 율법을 네가 마음에 두지 않으니, 나도 네 아들딸들을 마음에 두지 않겠다.
4:7 제사장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에게 짓는 죄도 더 많아지니, 내가 그들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겠다.
이제는 이스라엘을 내 마음에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고 무심한 자를 내 백성이라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주 무서운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정말 이스라엘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일까요?
정말 그들은 하나님이 염려하고 한탄할 만큼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한가?
아닙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들만큼 하나님 말씀에 능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보다 성경을 줄줄 꿰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자신의 목숨으로 여길 만큼 하나님 말씀에 목숨을 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마에 다는 경문을 더 넓이는 일에 열심이었던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2장을 보면 심지어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동방박사에게 메시아가 탄생할 곳을 정확하게 일려주기까지 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는 일점일획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너희가 지식을 버렸으니’
무슨 말입니까?
표면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은 능한데 문제는 내면적인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이 말하고자 하는 말씀의 궁극적인 목적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이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는 그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독생하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했다’는 말이고 이것이 바로 ‘너희가 지식을 버렸다’는 말의 내용입니다.
이는 사도바울 이후 오늘날 우리 교회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방인인 우리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의 후손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와 다른 이름인 그리스도인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의 공동체를 교회라 부르고, 우리의 공동체의 조직을 사람들은 그리스도교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도교
그런데 그 의미와 뜻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그 믿음의 대상과 그리고 믿음의 내용을 바로 파악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씀드린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바로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근본 위기는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잘 모르고 있는데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우리가 입버릇처럼 예수, 예수 하는데 정작 예수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줄줄 꿰고 성경을 줄줄 암송하기는 하는데 문제는 그 말씀의 실체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예수교/ 기독교(그리스도교)로 나누어져서 여전히 갈등과 분열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예수교/ 기독교 어는 쪽이 더 성서적입니까?
이처럼 오늘 우리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입니다.
한 번 묻지요.
천주교회가 그리스도교입니까 아닙니까?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그리스도교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에 기반에 둔 그리스도교입니다.
다만 마리아의 승천과 숭배라는 우리에게 좀 낯선 교리를 주장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은 천주교회는 우리와 같은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최대 관심사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바로 아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 복음전도 여행을 3차에 걸쳐서 감행한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바로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사람의 교회가 아닌 주님의 교회로 거듭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바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과거에 자랑으로 여겼던 그 모든 것(지식)을 배설물로 여길 정도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 생사를 건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할례의 증표, 이스라엘인 이라는 베냐민 지파, 히브리인, 바리새인, 율법의 의, 가말리엘의 최고 학문, 로마시민권 이 모든 것을 배설물 곧 똥 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후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
나에게는 그리스도를 믿는 곧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곧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말씀의 결론이었습니다.
이는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는 것.
3가지를 제시합니다.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3: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3:10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3:11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이 3가지를 바로 아는 것을 통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 그리스도를 안다고 했을 때 그 ‘안다’라고 하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야다(yada)'를 사용합니다. 이 ‘야다’라는 동사는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원칙이 있는데 하나님과 관련될 때만 이 ‘야다’라는 동사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 ‘야다’라는 동사가 언제 처음 성경에 등장하는가 하면 창세기 4장 1절입니다.
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여기서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에서 동침한다는 말이 ‘야다’입니다.
공동번역에는'한 자리에 누우매'라고 사실적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것이 히브리어 ‘야다’의 원뜻입니다.
이것을 나중에 헬라어로 옮긴 말이 '기노스케인' 입니다.
신약에서는 이 '안다'라고 하는 헬라어‘기노스케인’언제 처음 쓰여 지는가 하면 마태복음 1장 25절입니다.
1: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동침’이라는 말이 ‘안다’라고 하는 ‘기노스케인’‘야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고 했을 때 그 안다는 것의 의미가 분명해 집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 예수와 일심동체가가 된 상태. 하나님과 일심동체가 된 상태. 성령과 일심동체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을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인 우리가 항상 한 자리에 누워서 동침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파라클레토스’의 성령이 우리 안에 일심동체로 내주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안다’라고 하는 ‘야다’의 상태이고 ‘기노스케인’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로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는 다는 것은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과 동일하게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세 번째로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은 우리도 그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고 성령을 안다는 것은 이제는 그와 상관이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부부가 한 몸을 이루어 날마다 한 자리에서 동침하듯이 한 몸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일심동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우리에게 주어진 이 고난의 십자가를 외면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고 성령을 아는데 일심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자기 십자가. 이 역시 영광으로 알고 기쁘게 아멘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부활의 영광이 있는 날에 우리 주님과 함께 참예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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