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빌립보서 강해 3:4-9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

心貧者 2019. 1. 26. 16:25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

빌립보서 34-92014/ 8/ 13()

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 할 때 구원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로마서 117절입니다.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구원의 절대 조건이고 절대 진리입니다.

여기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물으면 선 듯 대답하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당신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말합니까?“라고 심각하게 물으면 의외로 남감하게 여기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어떻게 믿어야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일까요?

어떤 삶을 살아야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것일까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처럼 그저 지극정성으로 믿으면 될까요?

아니면 속으로는 믿어지지도 않는데, 왠지 의심하면 무서운 심판과 저주가 임할 것 같아서 그냥 믿으려고 애쓰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믿는 것이 예수님을 잘 믿는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그 믿음의 대상과 그리고 믿음의 내용을 바로 파악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우선 믿음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나사렛 사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내주 하시는 보혜사 성령님 역시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흔히 유일신 종교라고 말하는 유대교나 이슬람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삼위(분위)인데 일체이고, 일체인데 삼위로 존재한다.

사실 믿기 어려운 과학적으로 객관적 사실로 증명하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또 구원 받은 날에 매인 이들의 가르침처럼 인지의 능력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 즉 타력구원입니다.

이것을 바울이 로마서 117절에서 이렇게 설명한 것입니다.

1:17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서(하박국 24)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 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소위 유일신 종교라고 하는 유대교나 이슬람과 달리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우리를 죄와 악으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1장을 보면 유대인과 달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무리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가 처음으로 안디옥에서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도교입니다.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 다음으로 살펴볼 것이 믿음의 내용 즉 믿음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좀 쉽게 풀어서 설명한 말씀이 요한복음 112절에 나옵니다.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12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received)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여기에 보면 믿음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를 맞아들인 자입니다.

좀 더 쉽게 풀이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설명합니다.

관계성 속에서 의입니다.

그러고 보면 한자 의 의미가 남다릅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 자아가 놓인 관계.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고 내용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역사적 사건으로 또 객관적인 사실로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맞아들임, 영접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접하되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만왕의 왕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내용이고 믿음의 본질입니다.

찬송가 204장의 가사처럼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난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의 내용이고 믿음의 본질이고 믿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심령 가운데 오셔서 나의 왕이 되고, 나의 주인이 되고, 나의 중심이 되고, 나의 목적이 되고, 나의 전부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믿는 다면 그리스도외의 다른 목적이 존재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절대로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에 살을 붙이거나 또는 그 반대로 살을 떼어내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찬송가 4493절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남의 짐을 지고 슬픔 위로하면 주가 상급을 주시겠네.

주를 의지하며 순종하는 자를 항상 복 내려 주시리라.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이 찬송가 가사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 중심 안에 든든하게 서 있을 때 남의 짐을 지고 슬픔 위로하면서도 기쁨 가운데 살아가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감사이고 날마다 기쁨이고 날마다 충성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 유일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서 거듭나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의 구체적인 내용이고 본질이고 핵심입니다.

바라기는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온전히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믿음을 소유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구원의 방법 즉 두 가지에 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으로 말미암은 율법의 의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믿음의 의입니다.

율법의 의와 믿음의 의, 이 중 어떤 것이 우리 안에 구원의 능력으로 나타납니까?

물으나 마다 물론 믿음의 의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바울의 생각은 모세의 율법 즉 율법의 의가 구원을 이루는 유일한 조건으로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의만 생각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쳐 죽이는 일에 앞장 선 것입니다. 율법의 의만이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것으로 바울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4-6절에 내용입니다.

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하나님의 의를 율법의 의로만 따지자면 자신은 흠이 없는 자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바울의 삶은 율법의 의로 볼 때 정말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지요. 이스라엘의 족속이면서 베냐민 지파지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지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입니다.

이런 흠 없는 율법의 의가 곧 하나님의 의요 구원의 능력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선봉을 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뒤바뀝니다.

율법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믿음의 의입니다.

그래서 나온 고백이 로마서 333절입니다.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유대인만 적용되는 그래서 이방인을 차별할 수밖에 없는 율법의 의가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는 차별이 없는 믿음의 의입니다.

율법의 의에서 믿음의 의로 완전히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이전에 목숨처럼 여겼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복음전도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받은 엘리트 교육이나 로마시민권을 담대하게 배설물로 여기는 삶을 살아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배설물과 같은 육체의 자랑에 세상의 자랑에 늘 유혹을 받고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자랑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얻었는데 우리는 반대로 그리스도를 배설물로 여기고 육체의 자랑 세상의 자랑을 얻으려는 유혹 속에 빠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로서의 믿음

즉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의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맞이하는 삶을 날마다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처럼 세상의 자랑과 육체의 자랑을 배설물로 여기는 능력이 우리 안에서도 나타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