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순종
빌립보서 2장 12절-14절 2014/ 5/ 7(수)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2: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사도 바울이 늘 꿈꾸는 교회의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원망과 시비가 없는 교회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2: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을 공동번역 성경은 ‘불평과 다툼이 없는’ 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원망과 시비 즉 불평과 다툼이 없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것 이것이 바울이 꿈꾸었던 건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불평과 다툼, 이 문제가 없는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 속에서 늘 문제가 되었던, 가장 골치 아픈 문제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불평과 다툼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시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아주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유대인의 회당과 다른 신앙 공동체가 처음 세워지게 되는데 ‘에클레시아(그리스 민회, 신앙인들의 모임-공회, 거룩한 모임-성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임-교회)’라고 하는 교회가 이 땅 위해 처음 세워지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원시교회 또는 초대교회라고 부릅니다.
때로는 예루살렘에서 세워졌다고 해서 예루살렘교회라고도 부릅니다.
이 땅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 이하를 보면 당시 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여기에 보면 교회를 이루는 네 기둥이 나옵니다.
첫째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리고 직접 귀로 들은 증인으로서 사도, 그 사도의 가르침을 직접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모임(에클레시아)을 가르칠 교, 모일 회, 교회라고 부른 것입니다.
둘째는 교제하는, 친교하는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의 특징은 44-45절 그리고 4장 32-35절에 잘 그려져 있습니다.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4: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먼저 자신의 것을 나눔으로 친교하는, 교제하는 공동체입니다.
셋째, 떡을 떼는 식사공동체입니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성찬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주님 앞에 고백하고, 주님이 주시는 새 힘을 얻어, 주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이 일만 행한 것이 초대교회의 특징입니다.
그런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는 아주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당시 나이든 과부들에게 행한 구제문제로 인해, 교회 안에서 불평과 다툼이 생긴 것입니다.
어떻게 교회가 헬라파 과부들은 등한시하고, 유대인 과부들만 챙기냐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난 최초의 갈등사건입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의 공동체를 이루고, 매일 식탁을 나누고, 오로지 기도에만 모든 힘을 전념했던 초대교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불평(원망)과 다툼의 문제는 피해 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6장 1절입니다.
6: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교회 안에 생긴 불평과 다툼의 첫 번째 사례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이 불평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세워진 이들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곱 집사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일곱 집사 모두 히브리식, 다시 말해 유대식의 이름이 아닌 그리스식 즉 헬라식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누구지요?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스테파노)과 또 빌립(필립포스)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이처럼 공동체(몸체)로 구성된 교회는 불평과 다툼이 늘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문제가 없는 교회는 교회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쓰고 있는 빌립보서 역시, 빌립보 교회가 당면한 문제인 교회의 분열, 즉 교인간의 불평과 다툼으로 인한 교회의 분열 앞에서 사도 바울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해법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 것입니다.
첫째,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이 한 마음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다툼과 허영으로 교회를 분열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김으로 너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2장 1-11절의 당부입니다.
둘째, 그리스도가 가르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증거인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서로 협력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말씀을 나누었던 1장 27-3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이 두 가지를 끈임 없이 행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 그 구원의 생명을 날마다 유지하고, 이루어 나가라고 사도 바울은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 받은 자로서의 성숙한 삶입니다.
자력구원, 너희 스스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아버지 하나님에게 항상 복종하듯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 받은 자로서의 성숙한 삶,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성숙한 삶을 날마다 이루어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구원은 명사의 개념이 아니라 동사의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그리고 우리 삶속에서 이루어 나아가는 동적인 적극적 행동이 바로 구원이라는 동사적 개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우리를 끝까지 도우는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바로 내주하시는 성령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우리가 보혜사(파라클레토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풀어 말합니다.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공동번역성경입니다.(1977년 부활절)
2:13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여러분 안에 계셔서,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리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
그분이 누구입니까?
성령하나님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한 가지입니다.
14절과 12절을 합친 결론입니다.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 즉 불평과 다툼으로 하지 말고, 항상 순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에게 주어진 구원 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 내라는 것입니다.
‘나 없을 때에도 항상’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도의 눈치, 목회자의 눈치를 보고 순종하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두렵고 떨림으로 항상 순종하여 구원을 이루어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교회 공동체를 아름답게 이루어 가는 비결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비결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요즈음 언론에서 소위 ㄱㅇ파로 인해 야단법석입니다.
여러분 구원을 강조하고, 구원의 확신을 주는 그들이 왜 이단일까요?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실체하시는 하나님 곧 성령 하나님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실수는 구원의 개념을 진리로 나아가는 그래서 모든 죄와 악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동사의 개념이 아니라 내가 구원 받았다고 하는 완성, 구원의 결과라는 명사의 개념으로만 접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타적인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이기적인 자기 구원에만 매몰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계셔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 즉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리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 곧 보혜사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향한 하나님 구원, 그 약속과 성취는 의심할 여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육체우선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실수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심지어 다투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보세요.
마가 요한 때문에 다투어 갈라집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은 하나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 사실만 잊지 않고 오로지 성령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에만 힘쓴다면 언젠가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의 삶 그리고 우리 교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날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모여 기도에 힘쓰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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