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빌립보서 강해 1:19-26 유익함

心貧者 2019. 1. 25. 08:54

유익함

빌립보서 119- 262014/ 3/ 12()

1: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1: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1: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1: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1: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1: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의 강력한 본능에 의해 우리의 육체가 지배를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살고 싶은 본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죽고 싶은 본능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이 두 가지 본능에 의해 인간의 삶이 지배를 당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의 본능 중 어느 본능이 우리의 삶을 더 지배할까요?

살고 싶은 본능이겠습니까? 아니면 죽고 싶은 본능입니까?

죽고 싶은 본능입니다.

살고 싶은 본능, 삶에 대한 애착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것 같지만 실은 죽음에 대한 본능, 죽음에 대한 공포가 우리를 더 강력하게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게 무심코 이런 말을 내 뱉습니다.

아이고, 죽겠다.’

본능적으로 죽겠다라는 표현을 서슴없이 내 뱉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무의식이 죽음에 대한 본능으로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동경하는 것이 과거에 대한 향수입니다.

고향을 동경하거나 과거에 대한 옛 추억을 동경하지요.

왜 그렇습니까?

역시 죽음에 대한 본능이 그 원인입니다.

 

우리가 걱정을 늘 품고 살아가는 이유도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입니다.

걱정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심지어 내일에 대한 걱정까지 품고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조금만 속이 더부룩해도 혹시 암이 아닐까?

이런 두려움과 걱정 속에서 우리는 늘 살아갑니다.

 

이처럼 인간은 죽음에 대한 본능이 살고자 하는 본능보다 더 강한 법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김일성 부자는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고 꼭 기차를 이용한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한 본능이 공포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기차만을 이용한다고 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의 권력자인 김정은 위원장도 남한을 방문한다면 기차를 이용할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예측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중에 토마스 홉즈(Thomas Hobbes)라는 분이 계십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옥스퍼드 대학에서 스콜라 철학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분입니다. 이 분이 그의 일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에 이런 탄식을 했다고 합니다.

", 하루만이라도 더 살고 싶다. 나는 내 앞에 다가오고 있는 저 세상이 무섭다. 저 세상을 조금이라도 들여다 볼 수 있는 구멍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나 마지막 이 어두움 속으로 그냥 덥석 뛰어 들어가는 것 같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의 걱정 중에 최고의 걱정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문제를 다 해결한 분이 계십니다.

죽음에 대한 본능과 죽음에 대한 걱정.

이 두 가지의 문제를 다 해결한 분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처럼 죽음에 대한 본능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자유 했던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런 말씀은 요절 중에 요절입니다.

이런 요절 하나 정도는 외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말씀이 121절입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에게 누군가가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이 만일 내일 밤 12시에 죽는다고 한다면 오늘 무슨 준비를 하겠습니까?"

그 때 웨슬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글쎄, 따로 준비할 것이 없네요. 날마다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데 새삼 무엇을 준비하겠습니까? 평상시같이 사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밤 12시에 죽는다면 그 이튿날 새벽에는 천국에서 눈을 뜨겠지요."

이것이 바로 절대 자유, 절대 기쁨을 소유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내일 죽는다고 해서 요란 떨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웨슬리에 생각이었고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는 것과 죽는 것.

이 두 가지의 문제가 늘 우리 앞에 함께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유익한 것인지 아니면 죽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유익한 것인지.

이 두 가지의 문제에 끼어있는 것이 사도 바울이고 오늘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든지 살아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빨리 죽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가하다는 것입니다.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1: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1: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1: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사도 바울의 주장은 이런 것입니다.

21절의 말씀처럼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육체의 죽음 이 죽음의 문제는 이제 문제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평생을 그리던 그 하나님을 영원한 천국에서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사실 빌립보서를 쓸 당시 사도 바울은 지신의 마지막 사역을 마무리할 그런 인생의 시기입니다. 이미 자신은 늙고 병든 몸입니다. 앞으로 살아갈 날 보다는 죽는 날이 더 가까운 사람입니다. 거기다가 사도 바울은 옥에 갇힌 현실입니다.

그래서 후반부인 4장에 가면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후배 동역자인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소개하면서 자기 대신 영접해 줄 것을 당부합니다.

왜냐하면 살아서 빌립보 교회에 방문한다는 것은 이제는 좀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사도 바울은 죽음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처한 현실에 따라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진심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사울의 소원은 이것 이었습니다.

이왕이면 죽어서 천국 가는 것보다 그래서 평안한 안식을 누리는 것보다 힘들지만 죽을 만큼 힘들지만 살아서 복음을 더욱 더 증거 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에서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1: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이처럼 자기 자신이 죽는 것도 유익하지만 복음 전도를 위해 육신에 거하는 것 또한 유익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까?

1:25 내가 살 것너희 믿음의 진보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1: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첫째,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를 이루고

둘째, 성도의 교제를 통한 기쁨 충만하고 풍성함이 더하게 되는 유익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산다면 오직 성도의 유익을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우리가 부른 찬송가 442장을 보면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3.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무슨 말입니까?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주와 함께 하는 것도 원이 없는 일이지만 직행으로 천국가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신다면 이 땅에서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냐, 성도들의 믿음, 그들의 믿음의 진보를 돕고, 성도의 교제를 통한 기쁨을 더욱 풍성케 하는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는 것도 유익 하지만 사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