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진전
빌립보서 1장 12절-14절 2014/12/ 9(금)
1: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빌립보서 3번째 시간입니다.
들어도(들어도) 잊어버리는 분들을 위해 잠시 지난 시간의 말씀을 정리하고 오늘 주어진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빌립보서,
빌립보라는 도시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빌립보서라고 합니다.
‘빌립보 교회공동체(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주로 따르는 무리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마케도니아의 수도 빌립보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 도시로 당시 로마의 퇴역장군들이 모여 휴양 삼아 살기 시작하면서 로마 황제의 의해 계획적으로 건설된 신도시 중에 신도시입니다.
이 도시를 건설해 놓고 로마 황제가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필립포스의 이름을 따서 필립포스라고 부르면서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빌립보가 된 것입니다.
바울이 유럽의 첫 관문으로 빌립보에 복음을 전한 것은 바울의 선교 정책이나 바울의 의지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역사이지요.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 도마처럼 아시아로 선교의 발걸음을 옮기려 했습니다. 오늘날의 이란과 이라크 지역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하나님이 막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인도한 선교의 길이 유럽의 첫 관문 빌립보입니다.
빌립보서는 두 가지의 별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옥중 서신, 기쁨의 서신
서로 어울릴 것 같이 않은 두 단어다 아주 묘하게 어울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바울이 자신을 늘 소개 한 말 ‘예수 그리스도의 종’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 그리고 ‘종(둘로스)’ 나란히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 단어를 항상 같이 사용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여기에는 묘한 어울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교회는 늘 두 가지를 기억하게 하는 교회였습니다.
첫째는 기도 생활이고, 둘째는 감사 생활입니다.
기도 생활로 세워지고 감사의 생활로 열매 맺은 교회가 바로 빌립보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부터는 본론으로 들어가서 복음의 진전이라는 말씀의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눌까합니다.
하나님이 정한 인생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세운 목적만큼 그 가치와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귀한 목적을 가지면 그만큼 귀한 존재가 됩니다. 하지만 짐승 같다고 생각하는 천한 목적을 가지면 그만큼 천한 존재가 됩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 바울은 아주 분명한 인생의 목적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분명한 인생의 목적을 갈라디아서 1장 15-16절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나를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하시기 위해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셨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복음 전도를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태어난 때와 장소를 보나, 자신이 자란 문화적 배경이나 환경을 보나, 또 자신 배우고 익힌 학문을 보나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복음전도자로 하나님이 친히 세웠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살 의미 없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화가 미칠 것이라고 스스럼없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의 경우 복음을 전하지 않아 화가 미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화가 미쳤다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를 사명으로 알고 살아가면 적어도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만사형통의 축복을 주어야 합니다. 물질이든 사람이든 하나님이 붙여 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아브람도 그렇고 야곱도 그렇고 요셉도 그렇고 다 화를 당합니다.
이는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으로서의 바울, 사실 별 문제가 없습니다.
사도로서의 바울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 때문에 오히려 더 큰 문제 더 큰 어려움을 사도 바울이 당하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이 문제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특히 믿음이 연약한 분들은 여기서 다 넘어집니다.
예수 믿는 것이 형통인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것이지요.
잘 믿으려하면 할수록 어려운 일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한 뜻과 목적이 쉽게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역사를 바라는 사람은 소망의 인내의 자리로 나아갈 때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인내입니다.
참는 인내가 아니라 견디는 인내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견딤입니다.
더욱이 정한 뜻이 진리라면, 하나님이 정한 뜻이라면 더욱 그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자신이 늘 말한 것처럼 오직 복음 전도에 자신의 모든 목적을 둔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입니다.
1: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이 당하는 고난 즉 매 맞음, 감옥에 갇힘, 굶주림, 비난 등 그것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분명 부끄러운 일입니다.
어떤 이유든 간에 사람들로부터 매를 맞고 배척당하고 감옥에 갇힌다는 것은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동족으로부터 그런 대우를 받는 다는 것은 더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일이 복음의 진전(보)다 된다고 자신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믿음과 그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열정을 엿보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사도 바울의 전도 여정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말이 전도여행이지 여행이 아니라 고난의 길이요 죽음의 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자서전이라고 하는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입니다.
11: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11: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것을 보면 그가 당한 고난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들로 가득한 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곧 복음의 진전(보)가 되었다 바울은 자신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복음의 진전(보)는 역설적이지만 세상이 주는 고난과 환란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논리 인 것 같지만 이것이 바로 복음전도라고 하는 선교의 산 역사입니다.
지난 기독교 2000년 역사도 이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고난에 처해지고 복음 전도가 핍박을 받았을 때 복음의 진보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1903년에 있었던 원산대부흥 운동, 1907년에 있었던 평양 대부흥운동, 1910년 백만인 구령운동 이 모든 것이 모두 고난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복음의 진보라는 것입니다.
이는 70-80대에 일어났던 한국교회의 대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함 삶에서 부흥의 꽃이 핀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의 진보, 복음의 역사는 바로 고난 속에서 싹튼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오늘날 풍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증거 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고난 속에서 피어나는 복음의 진전이라는 꽃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진전(보)’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코페’입니다.
그 의미는 ‘찍어 가면서 전진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군인들이 전쟁터에 나가 전진할 때 여러 가지 장애물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처럼 복음 전도의 방해물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진전(보)라고 말합니다.
즉 장애물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 '복음의 진전(보)'이라는 말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의 진전, 신앙의 성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신앙이 자라고 성숙하고 진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우리의 신앙이 진보하기 위해서는 제어해야할 것이 있고 헤쳐 나가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여호수아가 하나님이 약속한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를 정복 아이성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장애물이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칠 수 없을 만큼 크고 높고 강하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을 제거하고 헤쳐나감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진보, 신앙의 진보,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장애물에 복음의 진보가 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매일 곳은 오직 한 곳입니다.
어디입니까?
그리스도 안입니다.
본문 13-14절처럼 말입니다.
1: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바울은 한 번도 자신이 감옥에 매여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바울을 반대하는 자들은 이것으로 바울을 공격하지만 자신은 한 번도 감옥에 매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내가 지금 감옥에 갇혔다고 해서 부끄러워하거나 복음의 진전이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나의 매임은 감옥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것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얼마나 멋진 신앙의 변론입니까?
말씀을 마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이처럼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전도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습니다.
복음전도의 사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기에 앞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매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 매여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 교회를 복음의 진전으로, 부흥의 진전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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