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가?
베드로후서 3장 8-14절 2014/10/24(금)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3: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나이 사십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 잠자리에서 일어난 후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거울의 비친 제 모습을 잠시 바라보는 것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유심히 살펴봅니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낯설게 여겨질 때, 제 스스로 제 자신에게 묻습니다.
'너 누구냐?’
특히 전 날 부끄러울 정도로 형편없는 생각과 행동을 한 후에는 제 자신을 더욱 유심히 바라봅니다.
그런데요.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제가 제 자신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때는 꽤 괜찮은 생각을 하고, 가끔은 신통한 짓을 하기도 하는 것 같은 데, 또 어떤 때는 제가 생각해도 부끄럽고, 어이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생각과 행동을 할 때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나이를 헛먹는구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내가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하는 체념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사이에서 방황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좋습니다.
그런 면에서 목사는 제 천직입니다.
열심히 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좋아서 그런지 날마다 공부하려고 애를 씁니다. 고3은 아니지만 고3처럼 공부합니다.
인터넷 강의 듣듯이 큰 목사님의 설교를 모니터 하구요.
성경세미나에 참석해서 열심히 공부도 합니다.
성경공부, 마음공부, 남의 나랏말 공부, 책 읽기 등 열심히 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 중에서 제가 으뜸으로 삼는 것은 성경공부입니다.
제가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탐구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원칙 하나가 있습니다.
노자 도덕경 48장에 나오는 말인데, 爲學日益 爲道日損(위학일익 위도일손)이라는 원칙입니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배움을 얻기 위해서는 날마다 더해가야 하고,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날마다 덜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성경을 읽고 탐구할 때는 이 원칙을 적용하려고 더 애를 씁니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날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과 동시에 제 자신 안에 있는 육체의 소욕을 덜어내고, 집착을 덜어내고, 미움을 덜어내고, 거짓을 덜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제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탐구하는 목적입니다.
베드로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3장 10-11절입니다.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3: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가?”
저는 베드로의 이 질문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물음을 자꾸자꾸 물어야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마음처럼 청결해지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처음 만나면 제일먼저 하는 일이 명함을 주고받는 일입니다.
'나 이런 사람입니다' 하는 거죠.
어떤 분은 명함에다가 이런저런 직함을 잔뜩 새겨 넣고는 뻐기듯 명함을 건네주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명함을 받을 때 마다 이런 못된 생각을 먼저 합니다.
'아, 굉장한 데. 대단한 분을 만났어.'가 아니라 '이 사람, 속이 허 한 사람이구나. 오죽 자기 존재에 자신이 없으면 이런 직함을 가지고 자신을 과시 할까? 참 불쌍하다'
이런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제가 사경회라든가 다른 교회에 초정을 받아서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으면 꼭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누구시지요?' 하고 자꾸 묻지요.
그러면 한결같이 자기 직함을 댑니다.
'집사입니다. 권사입니다. 장로입니다.’ 자신의 직함을 됩니다.
물론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정작 묻고 싶은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아직 이 질문을 이해하고 답한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종말에 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묻습니다.(베드로후서 3장 종말장: 주님의 재림이 거짓이라는 자들을 향한 반박문)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종말의 때에 당신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는가?”
그리고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종말의 때에 당신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입니다.
어떻습니까?
종말의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하며,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그 삶의 해답을 찾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시간 곧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구원의 시간에 맞추어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새 창조의 삶입니다.
베드로가 목회했던 초창기 초대 교회는 주님이 곧 재림하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내고, 또 어떤 이들은 세속적인 직업을 버리고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거룩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오신다던 분이 안 오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합니다.
'이거, 사기 아니야?'
그러면서 인내력이 부족한 몇몇 사람들은 재빨리 옛 생활로 복귀했습니다.
좀 진득한 사람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오실 주님을 기다렸지요.
설상가상으로 거짓 교사까지 등장해서 주님의 재림을 믿는 성도들을 유혹하기까지 했습니다.
주님의 재림,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교회 안에 언제부터인가 거짓 교사의 유혹을 받아 주님의 재림을 의심하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해명이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교인들의 의심을 잘 알고 있었던 베드로는 재림에 관한 지연에 있어서 충분한 해명이 필요하다고 여겨서 기록한 것이 베드로후서 3장입니다.
"정말 재림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뜸을 들이시는가?"
"다 너희를 위해서다."
"우리를 위해서라구?"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 회개해서 구원받을 때까지 그날을 연기하고 계신 거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시편 90편 4절을 인용하면서 재림이 지연되는 이유에 대한 자기주장의 논증을 폅니다. 그것이 8-9절 말씀입니다.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래서 주님의 재림이 더디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조급증을 버리고 조용히 기다려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속에 너희 인생, 너희 구원의 때를 진득하게 맡겨보라는 것입니다.
현실이 힘들고 불안하다고 조급해 하지 말고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살아보라는 권면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우리의 삶을 조율하는 것.
이것이 종말의 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첫 번째 자세입니다.
두 번째, 종말의 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는 하나님의 날, 구원의 날이 오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날/구원의 날이 오기를 思慕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思慕'한다는 말, 여러분이 그 뜻을 잘 아실 것입니다.
'思慕', 누군가 깊이 생각하고, 그리워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깊이 생각하고, 그리워하면 무슨 증상이 나타나지요?
실없는 사람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때문입니다.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이 사모함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이런 질문 하나 던지고 넘어가야합니다.
내가 주님을 정말 사모한다면 주님을 만나는 그 날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일까요?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행실은 거룩하고 마음은 경건에 이르는 것입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마음.
이것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의 격에 맞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날, 구원의 날이 오기까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마음’이라는 이 성품을 잃지 않고 살아내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자기 부인 곧 육체의 소욕을 줄이면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데 있어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우리 몸과 마음은 하나님이 거하실 집입니다.
그런 집이 세상의 소욕, 육체의 소욕 그리고 자기 자랑과 교만으로 가득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날마다 자기 부인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에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힘들지만 최선을 다해 보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종말에 때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할까요?
어떠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할까요?
이 근본적인 물음을 늘 던지며 사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마땅히 갈 길을 택하셨다면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십시오.
주님이 길벗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이 은총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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