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디옥교회
사도행전 11:19-30절 2014/10/17일(금)
11: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11: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11: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11: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11: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11: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11: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11: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신약성서에는 여러 교회들이 등장합니다.
예루살렘교회, 다메섹교회, 안디옥교회,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베뢰아교회, 두란노교회, 고린도교회, 로마교회 등 참 많은 교회가 등장합니다.
그 중 가장 이상적인 교회는 어디일까요?
여러 교회가 있겠지만 저는 안디옥 교회가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모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안디옥 교회를 본받기 위해 안디옥이라는 이름을 본 딴 교회가 참 많습니다.
실제로 어느 분이 조사를 해 보았는데 안디옥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가 전국적으로 108개나 된다고 합니다.
왜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안디옥 교회를 가장 이상적인 교회로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초대교회를 대표하는 두 교회, 즉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교회를 비교해 보면 그 이유를 조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시작된 교회입니다. 성령의 권능이 충만한 교회입니다.
하루에 3천명이나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한 교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강력했던지 자기 소유를 팔아 서로 나누는 착한 행실로도 책임을 다하는 교회였습니다.
날마다 모이기를 기뻐했고, 서로 떡을 떼고, 나누고, 주님의 오심을 소망하는 교회였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맛볼 수 있는 그런 교회가 예루살렘교회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정적인 약점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자기중심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처럼 유대주의를 넘지 못했습니다.
자기들끼리만 즐거워하고 나누는 교회였습니다.
이방인들이나 나그네가 들어갈 수 없는 교회였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진정한 교회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교회의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한 신학자는 교회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타자를 위한 존재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어떠한 경계도 어떠한 차별도 없이 생명의 복음을 모든 사람과 나누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흔히 교회를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는 예수님의 현현이라고도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예수님이 행하셨던 일을 그대로 행하는 곳이 교회라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교회는 안타깝게도 유대사회라는 자기중심의 울타리에 갇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두 할례 받은 유대인으로만 구성되었습니다.
결국 이 문제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과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인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선교적 사명을 예루살렘교회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누가보아도 성령이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천국의 삶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궁극적으로 바라시는 하나님 나라의 선교 즉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데 있어서 예루살렘 교회가 한계를 보였던 것입니다.
반면 시리아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보완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훗날 선교의 중심센터가 예루살렘교회에서 안디옥교회로 옮겨지게 됩니다.
사도행전 13장 이후를 보면, 복음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어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심에 서 있는 교회가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로 선교의 중심이 옮겨진 것입니다.
안디옥교회의 특징은 예루살렘 교회와 달리 할례의 증표가 없는 이방인과도 함께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지상명령인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는 하나님 나라의 선교적 책임을 거부감 없이 순종할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지닌 선교의 한계를 안디옥교회가 보완한 것입니다.
안디옥교회의 시작, 성경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11: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공교롭게도 안디옥 교회의 시작은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라는 위기의 상황 속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말미암아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름 없는 전도자의 헌신에서 이방인을 위한 교회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무명의 전도자입니다.
안디옥교회,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와 무명의 전도자의 헌신으로 세워진 안디옥교회는 이전에 없었던 2가지의 중요한 선교적 특징을 보여주게 됩니다.
첫째, 유대인을 넘어, 경계선을 넘어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20절입니다.
11:20 그 중에 구브로(키프로스)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이것은 초대교회의 탄생 이후 교회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교 선교에 있어서 분수령을 이루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만큼 헬라 말을 하는 그리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기준, 구원의 기준인 할례의 증표가 없는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열렸다는 것은 무척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방인을 향한 복음전도가 거대한 선교단체나 막대한 선교비가 동원되어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방인 선교의 일을 감당한 것은 불과 한 두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선교, 그것은 한 알의 밀알과 같은 헌신 된 몇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원칙은 그리스도교 선교의 역사가 됩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몇 사람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박해를 경험한 이들의 선교 열정입니다.
안디옥 선교에서 두 번째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박해를 겪은 사람들이 보여 준 선교 열정입니다.
신앙은 환난을 받을 때 강해집니다.
박해를 이겨낸 신앙만이 진정으로 자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2천년 역사가 보여주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 130년의 역사가 보여주는 진리입니다.
요즈음 한국교회의 위기를 여기저기서 이야기합니다.
위기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부유함입니다.
부유함으로 인해 고난의 영성이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영성의 특징은 고난의 영성입니다.
고난의 영성을 통해 한국교회가 성장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 교회가 고난의 영성을 놓쳐버리고 풍요로움에 취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한국 교회는 침체의 늪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왜 오늘 우리가 안디옥교회를 주목해야할까요?
가장 큰 이유는 안디옥 교회가 환난을 이겨낸 사람들이 세운 교회공동체라는 점입니다.
고난을 이겨낸 사람들이 세운 교회이지요.
안디옥 교회의 DNA 속에는 환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좌절 속에서 넘어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선교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선교의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안디옥 교회 사람들을 조롱하면서 부른 이름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원색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에게 미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 이것이 오늘 우리의 정체성을 주는 이름이 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제가 안디옥교회에 주목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방인에 대한 선교. 울타리가 없는 선교, 경계선이 없는 선교 곧 열린 마음입니다.
복음에 있어서 그 어떠한 경계가 없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환란을, 교회의 위기를 선교로 승화시킨 그들의 열정입니다.
이 두 가지를 소유할 수 있는 우리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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