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로마서 7:14-25 아, 나는?

心貧者 2019. 1. 13. 10:22

, 나는?

로마서 7:14-252014/10/10()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7: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7:16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7: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7: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오늘 본문을 보시면 바울은 자기 자신의 허물,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일에 그 어떠한 주저함도 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특히 사도직에 대한 시비가 끝이지 많은 바울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의 허물과 자기 자신의 연약함 드러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감출만한 사실까지 드러냅니다.

솔직해도 너무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냅니다.

14절입니다.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신령한 줄 알지만 그 율법을 실천하는(그 율법을 담고 있는) 나는 육정에 매인 존재로서, 죄 아래에 팔린 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메시지성경에서 이렇게 풀어서 번역해 놓았습니다.

나는 나 자신으로 가득합니다. 정말 나는 오랜 시간을 죄의 감옥에 갇혀 지냈습니다.’

육신에 속하여’, 이것을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나 자신으로 가득하다고 번역했습니다.

느낌이 확 살아옵니까?

나 자신으로 가득하다

 

나 자신으로 가득한 나

이런 분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항상 자기중심적입니다.

부처님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친 첫 법문을 빌린다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지요.

자기 존재만 존귀한줄 알고 무슨 일을 해도 무엇을 해도 항상 자기중심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분들은 심지어 상대방의 말이나 생각마저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과 조금만 달라도 서슴없이 배척합니다.

자기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분노하고 적개심을 드러냅니다.

미숙한 어린아이들과 같이 늘 이기적으로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미숙함이, 이런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가 내 안에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전도 초기 바나바와의 동역에서 이런 미숙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 다음으로 사도 바울은 죄 아래 팔린 자신의 몸의 나약함을 스스럼없이 고백합니다.

죄 아래 팔린 자신의 몸이 역시 앞에 언급한 육신에 속한 몸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다른 이들을 배려할 줄 모르는 자기중심성 곧 육체의 본성으로서의 죄가 자신을 여전히 사로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하나님의 사도로서 감출만도 일들은 주저 없이 고백합니다.

누가 물어 본 건도 아닌데 그렇게 얘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이것을 편지로, 기록으로 남깁니까?

육체적 본성으로서의 죄, 즉 나 자신으로 가득한 육정에 매인 삶이 얼마나 그리스도인의 삶을 고단하게 하고 힘들게 하는가를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죄의 무게감입니다.

죄 아래 팔린 몸, 죄의 감옥에 갇혀 있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비참할 수밖에 없는가를 말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사람들이 저를 그렇게 부르고 저 역시 제 자신을 소개할 때 목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아직 미숙한 것이 있습니다.

제 감정을 조절하는 일에 아직도 미숙합니다.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쉽게 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냅니다.

특히 부당하거나 불의한 일에 맞닿을 경우에 더욱 그렇습니다.

 

마음이 불편하면 제일 먼저 달라지는 것이 제 얼굴빛입니다.

그리고 말투가 거칠고 커집니다.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습니다.

목사로서는 아주 치명적인 약점인데 아직도 이 일에 미숙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다른 이들에게 불필요한 상처를 주기도 하고, 그런 제 자신으로 인해 스스로 낙심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감정 조절, 잘 되십니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저와 같은 고민일 것입니다.

아담의 첫 번째 아들 가인의 경우를 보시지요.

형제가 함께 정성스럽게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동생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형 가인의 제물은 반기지 않으십니다.

가인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몹시 불편했겠지요.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그 화를 조절하지 못하고 얼굴빛이 변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가인을 책망하시면서 엄중한 경고를 하십니다.

창세기 47절입니다.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비록 죄가 우리를 지배한다할지라도 오늘 우리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이 충고가 들려지십니까?

이것을 우리가 들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좀 달라질 것입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죄 아래 팔린 자기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은 이러한 주님의 충고를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죄에 대해서만큼은 믿음으로 일어서 있다. 다 됐다. 다 이루었다. 구원을 받았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ㄱㅇ파의 주장에 현혹되지 말고 죄에 대해서만큼은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결코 죄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장담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스칸달론.

죄의 스캔들에 말려들 자신이 있다고 스스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의 결과는 사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는 아주 충동적이고 죄의 유혹은 너무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는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이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리고 나의 육체를 사로잡고 있는 죄에 대한 다스림의 연습을 성령과 함께 해야 합니다.

죄의 충동대로, 죄의 유혹대로, 죄에게 속절없이 자신을 내어 맡기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의지를 거스를 때가 제법 많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 몸과 마음에 밴 죄의 버릇이 쉽게 고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 사도의 고백이 제 가슴에 절절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7: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모순이지요.

기가 막힌 모순이고 분열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자기 모순, 자기 분열, 자기 불화라는 현실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죄에 대해 철저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가 속절없이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고까지 말합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실행하지 않는 것이 그 증거라는 것입니다.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것이 바울만의 문제일까요?

오늘 나의 문제, 나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가요?

굳이 원죄의 교리를 말하지 않아도 악한 것에 대한 본능적 끌림, 자기중심의 본능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물론 거듭난 그리스도인 우리 속에는 또 다른 하나의 지향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삶의 방식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선한 행위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현실에서 번번이 패배하고 맙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17절부터 20절에 기록된 바울의 고백에 주목해야 합니다.

17절부터 20절을 유진 피터슨의 번역, 메시지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사실, 내게는 명령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율법을 알면서도 지키지 못하고, 내 속에 있는 죄의 세력이 계속해서 나의 최선의 의도를 좌초시키고 있다면, 분명 내게는 다른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내게는 있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나는 뜻을 품을 수는 있으나, 그 뜻을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나는 선을 행하기로 결심하지만, 실제로는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나는 악을 행하지 않기로 결심하지만, 결국에는 악을 저지르고 맙니다. 나는 결심하지만, 결심만 하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내 내면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매번 패배하고 맙니다.“

(유진 피터슨, <메시지>, 복있는사람, 409-410)

 

이런 깊은 자각 속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이 24절입니다.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되고 싶은 나현실의 나사이의 불화 때문입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자기를 사로잡아 버리는 죄를 힘차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무능함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흐름, 이 악순환을 어떻게 해야 끊을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 보혜사로 역사하시면 됩니다.

찬송가 190장입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할 만 충만하게 하소서

바로 이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25절의 삶을 살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25절 다시 한 번 유진 피터슨 목사의 도움을 받으면 좋겠습니다.

25 마음과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 하지만, 죄의 세력에 끌려 전혀 엉뚱한 일을 행하는 우리의 모순 가득한 삶 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은 모든 것을 바로 세우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분이 누구입니까?

성령입니다.

나를 죄로부터 자유 할 수 있도록 감화하시는, 우리의 모순 가득한 삶 속에 들어오셔서 모든 것을 바로 세우시는 성령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고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고 우리 교회에 필요한 것은 악에 맞서는 선한 일, 선한 행실입니다. 모순 가득한 삶 속에서 모든 것을 바로 세우는 주님의 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 까지 그 일에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권면을 드립니다.

지긋지긋한 죄의 인력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뜻을 수행하는 기쁨을 날마다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