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생명의 말씀
요한일서1:1-4절 2014/11/7(금)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1: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1: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날이 부쩍 추워졌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작은 불빛하나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작은 불빛이 우리의 몸을 따뜻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언 마음을 녹이기에는 충분한 빛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마음에도 그런 불빛 하나 밝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들어오기 전 옛 조상들은 은혜의 체험을 마음에 불을 밝히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가리켜서 ‘無明(빛이 없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어두운 마음을 밝히는 빛이 없어 세상에 대한, 물질에 대한 집착과 망상에 사로잡혀 산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은 우리 인생들에게 창조의 첫 날 아침에 하나님이 주신 첫 번째 선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빛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빛을 처음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야 할 대목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의 강림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2: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사도행전은 성령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처음으로 강림했을 때, 불의 혀 같은 것들이 사람들 위에 머물렀다고 전합니다.
이 역시 불의 빛을 뜻합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골방 밖으로 나와 제일 먼저 전한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퀴리오스 곧 주라는 선포입니다.
얼마 전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그 예수님이 우리의 퀴리오스 곧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주’
이것이 사도들이 전한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이 ‘주’라는 글자 역시 하나님의 빛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主’라는 한자를 이미지로 분해해 봅시다.
‘王’ 자 위에 점 하나가 찍혀 있는 모양입니다.
이는 마치 촛대 위에 빛나고 있는 빛을 형상화한 그림 글자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어두움이 없는 분이 하나님이고 어두움이 없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주님의 명령처럼 주님의 교회와 주님의 성도는 이 땅의 빛이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그 빛은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값없이 나누어 줘야하고 그리고 아무리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는 그 빛을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사랑의 빛, 긍휼과 자비 빛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세상 시류에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안타깝게도 그 빛이 언제부터인가 우리 속에서 가물거립니다.
마치 기름이 바닥나 빛의 동력을 얻지 못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빛의 동력, 바로 기름일 것입니다.
성령의 불을, 세상을 밝힐 사랑의 빛을 지속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타오르게 하는 원동력 즉 기름이 제때에 공급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의 원동력, 곧 불빛을 밝히는 기름.
저는 그것이 성경에 기록 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가까이 할수록 우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성령의 불을 간직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물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로 기록된 성경만을 말하지 많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말하고 있듯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도 우리에게 주어지 성경,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생명의 말씀’, ‘생명’, ‘영원한 생명’ 등으로 다양하게 지칭한 것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자리로 화육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한은 몸으로서의 말씀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다고 오늘 본문에서 증거합니다. 물론 이것은 당시 그리스도 예수의 육체성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자들에 맞서기 위해 선택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자꾸 말씀의 본질에서 빗나가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큰 말씀이기도 합니다.
한 번 묻겠습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과 정말 몸으로 만나셨는지요?
똑같은 질문을 여러분이 제게 하신다면 저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만났지만 아직 만나지 못했다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이 제 삶의 이유이고 목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주님의 마음과 온전히 하나 되어 일체의 삶을 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만났지만 아직 만나지 못했다고 답을 주고 싶습니다.
어느 때는 주님이 정말 가까이 계십니다.
그런데 또 어느 때는 너무도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는 아직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듯하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제가 가야 할 곳을 분명히 알고 간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오늘 본문을 기록한 요한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과의 만남 그리고 그분과의 사귐의 과정을 아주 감각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입니다.
1:1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
태초부터 계신말씀
우리가 들은 말씀
우리가 눈으로 본 말씀
우리가 지켜본 말씀
그리고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말씀
여러분은 이 중에서 어느 단계에 서 있습니까?
태초에 계신된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들은 말씀 즉 설교를 통해, 신앙 서적을 통해 그리고 다른 이들의 간증을 통해 들은 말씀입니까?
물론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그래서 잘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신앙의 정점은 잘 듣는 것을 넘어 우리가 눈으로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져보는 것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온갖 시련을 겪은 후에 욥의 고백처럼 귀로만 듣는 하나님이 아니라 눈으로 뵙는 하나님입니다.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자신이 교회들을 향하여 쓰는 편지에 대한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1: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요한이 교회들을 향하여 펜을 든 이유입니다.
요한이 목회 할 때 교회의 형편은 그리 녹녹하지 않았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의 신앙적 공격, 그리고 로마제국의 압제와 경제적 빈곤 등.
정말 신앙의 기쁨을 맛보기 어려운 교회의 형편들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이 땅의 흩어진 모든 교회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통해 성도의 기쁨을 회복하기를 원했습니다.
즉 우리가 들은, 우리가 눈으로 본, 그리고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말씀.
그 말씀으로 말미암은 기쁨의 선물을 환란가운데 있는 모든 이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이 글을 쓴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일이지만 어떤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어떤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밝아집니다.
그 차이가 어디 있습니까?
기쁨입니다.
기쁨이 잃은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하지만 기쁨이 충만한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시편기자는 말합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기쁨은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에서 우러나온다고 말합니다.
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 속에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들은, 우리가 눈으로 본, 그리고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말씀 안에서의 삶이고 능력입니다.
몇 년 전 돌아가신 김흥호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쁨으로 사는 것이 믿음이요, 이 기쁨을 보여주는 것이 사랑이요, 이 기쁨을 전하는 것이 복음이다’
어떻습니까?
이분의 가르침이 눈으로 보여 지고 손으로 만져지는 지요?
곧 기도하실 텐데 기쁨으로 사는 믿음의 회복을 위해 먼저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이 기쁨을 보여줄 사랑의 수고를 소망하면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 하나 더 기쁨을 전하는 복음의 삶에 헌신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잠시 잃어버렸던 기쁨의 에너지가 넘쳐날 것이며, 세상에 계시된 생명의 말씀, 그 말씀의 실체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축복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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