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표적
요한복음 2:1-11절 2014/1/17(금)
2: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2: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2: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2: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2: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2: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2: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청파교회에서 목회하는 김기석 목사님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방법은 인생을 살아가는 제일 좋은 방법인데 자신이 좋아하는 일, 곧 가슴 뛰는 일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럴 형편이 안 된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즐길 줄 알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방법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은 이도저도 아니면 인생을 군복무처럼 ‘복무’한다고 생각하고 사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셋 중 어느 쪽에 속하는 마음으로 이 밤에 나오셨습니까?
가슴 뛰는 마음으로 달려 나오셨는지요?
이왕 나온 김에 즐길 마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지요?
아니면 혹 군복무처럼 ‘복무’하듯 앉아있는지요?
어떤 이유든 다 좋습니다.
어떤 이유든 간에 ‘착하고 충성된 종아! 참 잘했다.’라는 주님의 칭찬이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본문은 요한복음 2장의 첫 표적입니다.
2장 1-2절입니다.
2: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어느 날부터 사흘째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초대로 받아 한 자리에 모였을 때에 일어난 일로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뉴스를 보도하듯이 이 사건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긴박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3-5절입니다.
2: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2: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대부분의 경우 이 본문을 예수님이 베푸신 첫 번째 기적의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첫 표적(세메이온)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설교는 첫 번째 기적(미라클)의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그리고는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웠던 하인들의 순종을 당신들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도 물이 포도주가 되는 주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본문에서 생략된 부분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신 후 첫 번째로 찾으신 집이 왜 혼인 잔치가 벌어지는 집이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 혼인잔치집일까요?
도대체 이 사건은 주님의 공생애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구약성경 전도서 7장 2절-4절을 찾아보겠습니다.
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7: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7: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이런 기준으로 보자면 예수님은 지금 공생애의 출발을 잘못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결혼 풍습을 알고 나면 생각이 좀 달라집니다.
유대인이 결혼에 이르기까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매우 복잡한 절차를 거칩니다.
첫째는 약혼의 단계입니다.
약혼은 대부분의 경우 나이가 어릴 때 신랑의 아버지와 신부의 아버지 사이의 합의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다가 여자의 나이가 만 12세가 지나면 정혼을 합니다.
정혼은 약혼한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으로, 일단 정혼이 성립되면 이들은 이미 결혼한 사이로 간주되어 남편과 아내로 불렀습니다.
정혼이 설립되면 남자는 포도주를 따라 여자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을 나의 아내로 맞고 싶습니다. 이 포도주를 당신에게 따라 줌으로써 나는 당신을 위해 나의 생명을 바칠 것을 다짐합니다. 당신도 이 잔을 받아 마심으로 나의 아내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런 후 신랑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 아내를 맞이할 경제적 준비를 합니다.
정혼 기간은 보통 1년 정도인데 결혼식을 치룰 경제적 준비가 미흡하면 1년 이상 걸리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결혼식은 보통 밤에 합니다.
신랑이 신부 집으로부터 아내를 데려 오면서 시작이 됩니다.
결혼하는 날, 두 사람은 과거의 모든 죄를 다 사함 받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다는 뜻으로 금식을 합니다. 그래서 결혼식 날을 유대인들은 개인의 대속죄일(private Yom Kippur)이라고 부릅니다. 결혼식 절차를 다 마친 후, 신랑 신부는 ‘한 몸’이 되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 준비된 신방으로 들어갑니다. 의식이 끝나면 신랑은 문을 열고 나와 신부와 한 몸이 되었음을 알립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결혼식 잔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혼인 잔치는 보통 칠일 동안 이어집니다.
칠일 간의 잔치이기 때문에 신랑 입장에서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부담이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 잔치를 위해 신랑의 가족들은 아주 오랫동안 철저한 준비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음식이나 술이 떨어져 흥이 깨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약 1년이라는 정혼 기간이 중요한 것은 이 기간 동안 신랑 측이 철저하게 준비해야 혼인잔치를 잘 치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결혼 의례에는 꼭 포함되는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헌신입니다.
그것은 신랑이 신부에게 포도주를 따라주면서 하는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나의 생명을 바칩니다.”
둘째는 결단입니다.
신랑 신부가 옛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뜻으로 금식을 하는데 이것으로 결단을 표시합니다.
셋째는 하나 됨의 의식입니다.
합방을 통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넷째는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는 혼인 잔치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이 공생애의 시작을 혼인 잔칫집에서 하신 것은 참 적절한 일인 것 같습니다. 이 네 가지 과정 전체가 예수님의 사역과도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치러야 할 의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례 중 하나인 혼인 잔치에 손님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랑이 신방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환호성이 터졌을 것이고,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준비된 음식과 포도주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 노래가 빠질 수는 없겠지요.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흥이 나서 함께 따라 불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흥겨운 자리에서 예수님은 어떤 표정을 짓고 계셨을까요?
못마땅한 표정일까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잔치 집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았다면 그 흥의 그 원인인 포도주를 물로 바꾸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심술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과 어울려 흉허물 없이 먹고 마시고, 한껏 유쾌해지셔서 노래도 함께 부르셨을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런 예수님像을 잃어버린 것이 우리 교회의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세상이 예수님에게 준 별명은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 ‘세리와 죄인의 친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유난히 술과 음식을 밝히신 분이라고 필요 이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이 별명이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는 거룩의 모양만 있는 종교지도자들의 곱지 않은 시샘이라고 생각합니다. 경건해서, 종교적으로 너무 경건해서 세상과 등진 사람들이, 세상과 이웃이 될 수 없는 그들이 자신의 한계를 들어 낸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 곁에 그 누구든지 친밀하게 다가서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잔치 집에서 만큼은 누구나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어울릴 수 있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가난한 자도 죄인도 심지어 창녀라 할지라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의 시작을 알리는 혼인잔치의 결론을 이렇게 맺은 것입니다.
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한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 첫 번 표징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시니,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자칫 흥이 깨질 수밖에 없는 혼인잔치를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킴으로 혼인잔치를 더욱 흥겹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첫 번째 표적, 예수님이 행하신 첫 번째 표징(archen ton semeion)이라고 요한은 아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표적(징)’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주는 상징이 그 안에 숨어 있는 것이 표적(징)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라고 번역된 단어 ‘아르케’는 ‘시작’이라는 뜻도 있지만 ‘기원’ 혹은 ‘근본’이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 표적은 첫 번째 이적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분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보여주는‘그 기원’을 밝히는 사건이라는 뜻으로도 새길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가나 혼인 잔치 표적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언제나 삶의 흥이 난다는 것입니다. 기쁨이지요.
삶 그 자체가 ‘카니발’, 축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신앙은 바리새인처럼 우리를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해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목록 613개 앞에서 전전긍긍하도록 만드는 신앙이 아닙니다.
심판이 두렵고 지옥이 무서워 오늘을 누리지 못하도록 하는 울적한 종교는 예수님과 무관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진정한 삶의 맛과 진정한 삶의 흥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잃어버린 흥을 다시 살리시는 그 멋진 분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저도 모르게 흥이 나고 신명이 나고 노래가 나오고 찬양이 터치고 덩실덩실 춤을 추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이 땅에서 행하신 첫 번째 표적인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신명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고 했습니다.
내가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는 내 주변의 분위기를 살피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얼굴에서 행복한 웃음이 피어나고, 그들의 몸짓에서 신명이 나고 흥이 난다면 우리는 제대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있는 것만으로 흥이 깨지고 분위기가 어둡다면 한 번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영국을 대표하는 낭만파 시인 바이런은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매/ 그 얼굴이 붉어졌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멋진 주님을 만나 포도주처럼 향기로운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예수’라는 그 이름에 여러분의 인생을 걸만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예수’라는 이 멋진 이름에 제 인생을 걸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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