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요한복음 14장 1-11 티테디오스

心貧者 2019. 1. 13. 10:10

티테디오스

요한복음 141-112014/ 8/ 15()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14: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14: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14: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오늘은 우리나라가 36년 동안 일본으로부터 강제 점령을 받다가 해방이 되어 나라와 주권을 다시 찾은 날을 기념하는 광복절입니다. 1945815일이니까 올해가 69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해마다 광복절이 되면 참 안타까운 두 인물이 생각이 납니다. 육당 최남선 선생님과 춘원 이광수 선생님입니다. 육당 최남선 선생님은 191931일 만세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한 당대 최고의 문필가입니다. 그의 글을 보면 대한독립에 대한 의지와 힘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든 그의 글을 읽으면 자주 독립 운동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아주 호소력 있는 글의 힘을 가지 분이 육당 최남선 선생님입니다.

그리고 춘원 이광수 선생님 역시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과 신한청년당,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인물로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회와 독립신문 발행을 맡은 대표적인 독립 운동가입니다. 나라 잃은 백성들의 스승이요 민족의 대표적인 지도자들입니다.

참 귀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결국에는 민족의 배신자요 변절자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들을 독립운동가가 아닌 친일 매국노로 규정합니다.

한때 나라 잃은 백성들의 스승이요 독립운동에 중심에 섰던 이분들이 결국에는 민족의 배신자 민족의 변절자가 되고 맙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감당하기 어려운, 말로 다할 수 없는 일제의 핍박 때문일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배신과 변절한 시점이 1941년과 1944년이라는 것입니다.

1945년 해방을 몇 년 앞두고 이들이 민족의 배신자, 민족의 변절자가 되고 맙니다.

 

역사의 가정이라는 것이 없지만 만약입니다.

만약 19458.15 민족의 해방, 나라의 행방이 온다는 것을 이분들이 알았다면 민족의 배신자, 민족의 변절자가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장차 해방될 조국의 미래를 믿는 것 보다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의 고난이 더 켰기 때문에 결국 그들을 민족의 배신자 민족의 변절자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이 역사이고 이것이 현실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차가지입니다.

만약 이들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뿐만 아니라 부활의 영광도 함께 있다는 사실을 정말 믿었다면 가롯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이 가능하겠습니까?

절대로 불가능 합니다.

부활의 영광을 목격하고 예수님을 배신하고 예수님을 부인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부활의 대한 소망, 부활의 대한 믿음 보다는 현실적인 고난이 더 크게 보였기 때문에 결국에는 배신과 부인이라는 죄의 본성이 들어나고 만 것입니다.

 

이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명의 제자인 도마와 빌립도 마찬가지입니다.

5절입니다.

도마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14: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도대체 주심이 가신다고 하는 그 십자가의 길이 어떤 길인지, 속 시원하게 가르쳐 달라는 것입니다. 따라갈 만한 길인지? 아니면 갈 수 없는 길인지? 도대체 우리가 어떤 길로 가야하는지? 좀 속 시원하게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마의 질문입니다.

한편 빌립의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14: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주님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하나님을 보여주면 그러면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우리의 불안감이 사라지고 좀 안심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 속에서 다가오는 인간의 연약함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라 간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내일에 대한 불안감이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따라 간다고 하지만 내일에 대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이것을 떨쳐 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현실의 상황이 좋지 않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지니고 있는 육체의 연약함, 인간의 한계를 예수님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시작하면서 주님이 이런 말씀으로 우리를 먼저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1절입니다.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내일에 대한 공포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믿듯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를 구세주로 주님으로 그리스도로 이 시대의 메시야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서로 다른 말인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의 뜻입니다.

바로 생명 있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근심과 염려가 없는 살아있는 산 믿음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도둑처럼 자리 잡았던 마음의 근심과 걱정,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내일에 대한 공포감이 눈 녹듯이 다 사라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를 뜨겁게 했던 티테디오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1세기 이후 기록된 초대 교회의 문헌을 살펴보면 많은 그리스도인 앞에 티테디오스라는 별칭을 이름 앞에 붙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치 공식처럼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라는 별칭을 붙입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를 붙어서 티테디오스 베드로이렇게 부릅니다.

티테디오스 바울, 티테디오스 요한, 티테디오스 야고보, 티테디오스 안드레, 이렇게 부릅니다.

 

이쯤되면 티테디오스라는 별칭의 뜻이 무엇인줄 궁금하시지요?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환란이나 위협이나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

이것이 티테디오스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근심과 염려에서 해방된 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힘의 원동력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하시는 진리의 영.

곧 성령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가 썼던 글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을 통해서 우리 조선이 굉장히 큰 어려움을 당했다. 그런데 이 국난이 우리에게 준 큰 유익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에게 충신과 간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해준 것이다.’

 

평상시에는 사색당파가 딱 나뉘어져 있어서 누가 충신이고 누가 간신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국난이 충신을 돋보이게 하고 간신이 누구인지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평상시는 나 자신의 믿음을 잘 모릅니다.

그 믿음이 그 믿음인 것 같고 잘 모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티테디오스의 이름을 가진 것처럼 결코 염려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인지 아니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도마와 빌립처럼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힌 사람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닥치면 자신의 믿음의 실체가 바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티테디오스인지 그렇지 않은지가 분명해 진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고린도전서 1013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과 능히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시는 데, 그런데 왜 우리는 고난이라는 시험 앞에서 번번이 넘어지고 좌절하는 것일까요?

왜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근심과 염려의 잡초가 우리 마음 밭에 자라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대한 부정입니다.

그리고 이 시험은 지금 나만 당하고 있는 불의한 시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염려와 근심과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셨다.

뿐만 아니라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셨고 그리고 너희가 능히 그 시험을 감당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지요. 살아있는 산 믿음입니다.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 ‘티테디오스의 믿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티테디오스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만 당하는 고통이라는 이기심에 빠져나오십시오.

그리고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하시는 진리의 영. 곧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티테디오스라는 별명이 우리의 별명이 될 것입니다.

티테디오스이 축복의 명칭이 주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