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사도행전 13:38-39 과녁

心貧者 2019. 1. 11. 14:20

과녁

사도행전 13:38-392014/3/16(주일오후)

13: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13: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시리아 안디옥 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구브로, 지금의 키프로스 섬에서 첫 번째 전도여행 치고는 아주 성공적인 선교활동을 경험하게 됩니다. 당시 그 섬을 주재하던 총독이 바울과 이름이 절반이 같은 서기오 바울인데, 그 서기오 바울이 복음에 대한 깊은 가르침을 받고 주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첫 번째 전도여행에서 얻은 첫 번째 전도 열매인 셈입니다.

 

물론 선교의 훼방꾼도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힌트를 드릴까요?

오늘 본문 13장 앞부분에 그 이름이 나옵니다.

6절에 등장하는 바예수입니다.

바예수라는 엘루마에 의해 복음 전도의 방해를 받게 됩니다.

바예수란 예수의 아들 즉 구원자의 아들이란 뜻이고, 엘루마란 마술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6절에서 바 예수를 이렇게 풀어 성경은 소개합니다.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

이 사람이 서기오 바울의 회심을 막습니다.

하지만 누가 성령의 역사를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엘루마 바예수의 훼방 속에서도 결국 서기오 바울은 회심을 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키프로스 섬 총독 서기오 바울이 바울의 선교 여행의 첫 번째 열매가 됩니다.

 

얼마나 좋았을까요?

막연했던 전도여행이 드디어 손에 잡히지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에 대한, 전도에 대한 확신이 서자 좀 더 먼 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 산다고 하는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향하게 됩니다.

우선 배를 다시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항구도시 버가에 도착합니다.

그런 후 거기서 다시 200km을 걸어 비시디아 안디옥을 향해서 걷게 되는데 아주 어려운 난관을 만나게 됩니다.

평균고도 800m가 넘는 토루스 산맥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에 대한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힌 이 두 사람은 그 힘든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게 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 한 후 첫 번째 맞는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이 되자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갔습니다.

회당예배 전통에 따라 회당장은 율법서와 예언자의 글을 낭독한 뒤에 바울과 바나바에게 사람들에게 권면할 말씀이 있으면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주저하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바울의 첫 번째 설교입니다.

16절 이후부터 바울의 첫 번째 설교가 기록 되어 있는데 요약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을 죄로부터 구원한 출애굽 사건으로부터 시작해서 가나안 입성과 사울과 다윗으로 이어지는 왕정에 이르기까지 쭉 설명을 하는 듯하더니, 느닷없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구세주를 세우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라는 것을 단숨에 선포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주장을 확증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여러분은 나를 누구로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는 내 뒤에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13:25)라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25절에서 덧붙입니다.

 

이어서 그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그 어떠한 죄가 없었지만 성전 체제의 특권, 그리고 종교의 특권을 유지하고 싶었던 이들의 모함과 박해로 인해 나무에 달려 죽게 되는 비참함을 당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죽은 자를 그냥 버려두지 않고 예수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첫째 하나님은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하셨던 구원자의 약속을 이루셨고 그리고 둘째 하나님이 살리신 분 즉 예수가 썩음을 당하지 않는 영생의 생명이 되어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전하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이라고 바울은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런 후 설교의 결론에 가서 권면의 말씀을 전한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죄사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사람 즉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죄 사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을 읽겠습니다.

13: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13: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새번역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13:38 그러므로 동포 여러분, 바로 이 예수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죄 용서가 선포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3:39 여러분이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던 그 모든 일에서 풀려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 이 상황이 그려지십니까?

바울은 확신에 차서 죄 사함의 회개를 외치고 있지만 회당장을 비롯한 유대인 회중은 뜨악한 시선을 바울에게 던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주장과 권면이 유대인들이 볼 때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떻게? 죄의 문제가 이렇게 쉽게 처리될 수 있지? 짐승을 잡아 바치는 제사행위 없이도 정말 죄 사함이 가능할까? 성경 어디에 그런 대목이 있지?’

세례 요한의 물세례도 그랬지만 이처럼 당시 죄의 용서에 대한 문제는 유대인 사회에서 언제나 시빗거리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이라면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25절에서 예수님이 중풍병 환자에게 하신 말씀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2:5)라고 선언한 것이 율법학자들에게는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과 저주의 상징으로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 죽인 것입니다. 죄의 심판으로 십자가에서 처형한 것입니다. 이처럼 죄의 문제, 특히 죄의 용서함의 문제는 유대사회에서 늘 시빗거리였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죄가 무엇인지, 죄의 용서가 무엇인지 그 개념이 명확하십니까?

사실 여기서 신학적 갈등이 생기고 교파가 불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그리고 그 죄의 용서함의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과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어려운 문제를 여러분에게 이 시간 던지는 것은 그렇게 해서 이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자 하는 이유는 지금이 사순절 순례의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죄에 대해서 그리고 그 죄의 용서함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묵상하고 묵상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참 다루기 어려운 이 죄의 문제를 꺼낸 것입니다.

 

,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죄를 뜻하는 단어는 하마르티아hamartia’입니다.

이 단어의 동사형이 중요한데 하마르타노입니다.

번역하면 과녁을 빗나가다’, ‘과녁을 잃어버리다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란 하나님이라는 과녁, 하나님의 나라라는 그 과녁에 적중하지 못하고 빗나가는 삶, 즉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마땅히 걸어야 할 생명의 길에서 벗어난 삶을 성경은 하마르티아hamartia’ 죄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정의 명확해졌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과녁, 하나님의 나라라는 과녁의 실체는 대체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과녁, 하나님 나라의 과녁을 맞히는 것일까요?

성경은 그것을 크게 두 가지의 삶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겨누어서 적중해야 할 인생의 과녁입니다.

 

여기서 제가 여러분에게 확인하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사순절 순례의 여정 속에서 지금 여러분이 혼신의 힘을 다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으로 빗나가는 삶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과녁을 향하는 삶입니까?

우리가 사순절의 시작을 재의 수요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재의 수요일, 그 날부터 빗나가는 삶을 고쳐먹겠다는 다짐 속에서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인데 지금 여러분은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라는 정확한 과녁입니까? 아니면 그 과녁을 빗나간 세상입니까?

 

한자로 라는 단어가 참 재미있습니다.

그물 망부에 잘못을 뜻하는 아닐 비자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이라는 망에 갇혀서 답답한 상태 곧 부자유한 상태가 죄입니다.

바울은 그 죄의 갑갑함 때문에 이런 탄식까지 내어 뱉기도 합니다.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처럼 죄는 답답하고 갑갑한 것입니다.

그냥 용인하고 용납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 죄로 향하는 과정을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의 특권이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먼저 (죄의) 유혹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일 수도 있고, 육체나 악마로부터 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죄가 가까이에 있다고 경고하면서 더 열심히 깨어서 기도하라고 명하십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즐거움을 약속하는 유혹에 어느 정도 양보합니다.

4) 성령은 깊이 슬퍼하십니다. 우리 믿음은 약해지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차가워집니다.

5) 성령은 더욱 날카롭게 경고합니다. “이것이 길이다. 이 안에서 걸으라.”

6) 하나님의 음성에서 돌이켜 유혹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7) 마침내 악한 욕구가 영혼 속에 펴져서 믿음과 사랑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그는 죄의 포박에 확고히 매이게 됩니다.

마치 어김없는 우리의 현실을 말하는 것 같아 마음이 먹먹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죄 사함의 방법,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 땅에서 유일하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2:5)는 과거형으로 사죄의 선언을 한 분, 즉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이 선언한 말씀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단죄하거나 정죄하지 않는 주님의 사랑 그 자비하심에 거하는 것입니다.

 

둘째,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향해 하신 말씀 요한복음 811절처럼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를 믿는 다면 이제부터 다시는 하나님의 과녁을 빗나가는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를 정죄하지 않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을 우리가 정말 믿는다면 그 증거로 죄의 용서함을 받은 자답게 죄를 멀리하고 죄를 범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를 믿는 것과 죄를 멀리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두 가지의 방법이라고 설명했지만 실은 이 두 가지가 하나의 고리로 연결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게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과녁을 향하는 기도 생활이고 예배 생활이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구제생활, 봉사생활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요즈음 수요일 마다 제 시간이 되면 빌립보서를 강해합니다.

빌립보서 1장을 보면 눈에 확 들어오는 말씀이 있어 여러분에게 소개할까합니다.

1: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여러분의 신앙을 책임지고 있는 목사로서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권면의 말씀입니다.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의 과녁에서 빗나가는 삶과 행실을 더 이상 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빗나감을 멈추십시오.

, 혹입니다.

죄의 유혹으로 인해 빗나간 삶을 살고 있다면,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오는 근심과 걱정과 절망이 여러분의 삶을 답답하게 하고 있다면, 그 자리에 더 이상 주저 않지 마시고 대자 대비하신 하나님의 품을 향하여 여러분의 몸을 다시 일으키시고 여러분의 발걸음을 다시 돌이키십시오.

기도생활의 회복으로 돌이키시고, 예배생활의 회복으로 돌이키시고, 말씀생활의 회복으로 돌이키십시오.

그리고 마지막 하나 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소원하시고 또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보혜사 성령님이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