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
이사야서 58:6-12절 2014/4/13(주일예배)
58: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58: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58: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58: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58: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58: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58:12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신약성경을 읽다보면 대표적인 경건주의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을 우리가 바리새인들이라고 부릅니다.
‘바리새(바리사이)’라는 말은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해 철저하게 구별된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613개 조항의 율법이 있습니다.
반듯이 해야만 하는 긍정적인 계명이 248개이고,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 부정적인 금지 계명이 365개입니다. 248이라는 숫자는 사람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부분 부분의 총합을 의미하고, 365이라는 숫자는 1년 356일을 뜻합니다.
이것을 가장 철저하고 엄격하게 실천하는 종파가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철저하게 구별 된 그들을 향해서 ‘구별된 자’라는 뜻을 가진 ‘바리새(바리사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 중에서도 자신의 경건생활(신앙생활)을 위해서 매일 같이(하루도 빼지 않고) 아주 적극적으로 행하는 3가지의 계명이 있습니다. 혹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마태복음 6장을 보면 그 해답이 나옵니다. 무엇입니까?
첫째는 구제 생활이고 둘째는 기도 생활이고 마지막 셋째가 금식 생활입니다.
이 세 가지의 계명을 아주 철저하게 지킵니다.
이 중에서 오늘은 금식에 대해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눌까합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대속죄일(Yom Kippur 욤키푸르)에만 금식을 했습니다.
대속죄일은 신년 축제인 로쉬 하샤나(Rosh ha-Shanah)로부터 열흘 째 되는 날인데 하나님에게 지은 죄는 물론이고 이웃들과 불화하거나 갈등을 빚었던 모든 일들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며 죄의 용서를 구하는 날이 대속죄일입니다.
이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에 대한 슬픔을 금식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몇 가지의 금식하는 날을 더 제정하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으로부터 1차 침공을 당한 날
예루살렘이 파괴된 날
성전이 파괴된 날
그리고 아히감의 아들 총독 그달리야가 살해당한 날들을 추가해서 금식을 했는데 모두가 이스라엘의 패망과 관련된 날들입니다.
그들이 그 날에 금식한 이유는 하나님을 거역한 삶이 얼마나 쓰라린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한 기억차원에서 교육차원에서 금식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것이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금식에 대한 참된 정신은 사라지고 제도만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 본문 앞부분에서 이렇게 고발합니다.
58:3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58: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58: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모든 것을 절제해야할 금식의 날에 오히려 오락과 향락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금식하는 일꾼(노동자)들에게 무리하게 일을 시키는 무자비함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금식을 위해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깔고 앉아 있기는 하지만 이웃과의 다툼과 싸움은 여전하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웃에게 악한 주먹을 쓰는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무슨 금식입니까?
그런 금식은 하나님이 받아들이겠습니까?
이러한 거짓 금식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가 지금 문제제기하는 것입니다.
금식에 대한 본과 말이 완전히 뒤집혔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금식의 계명이 그들에게 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종교의 본질은 외적인 규례의 실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으로의 회복에 있다’
즉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본질의 거듭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금식을 통해서 구제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새로운 존재로 본질이 거듭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금식하는 행위와 구제하는 행위와 기도하는 행위 등 그 껍데기에만 사람들이 관심을 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금식에 대한 본과 말을 완전히 뒤집어 놓고도 그 껍데기를 참 인양 착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하는 요지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에 매우 유익한 도구들입니다.
웨슬리의 말처럼 은총의 수단들입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바리새인보다 더한 구제생활과 바리새인보다 더한 기도생활과 바리새인보다 더한 금식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 점을 아주 강조합니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문제는 그 은총의 도구들이 본과 말이 완전 뒤집혀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결과는 엉뚱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제, 반드시 바리새인보다 더한 구제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목적이 되면 오히려 자기의 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 반드시 바리새인보다 철저한 기도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영적인 교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금식,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의 금식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는 교만의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독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금식이란 무엇일까?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금식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결박(속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58: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 주고,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참된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얼어 메고 결박하는 모든 죄악과 사망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곧 구원의 역사,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야 참된 금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굶주린 사람에게 우리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나눔입니다.
58: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배고프고 굶주린 자와 양식을 나누고, 빈민을 돌보고, 헐벗은 자를 입히는 것, 이것이 진정한 금식입니다.
강아지 똥의 저자 권정생 선생님은 어린 시절에 거지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경상도 일대를 떠돌면서 유랑걸식을 하였는데 그때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때의 고마움을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 라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열흘 동안 매일 아침마다 찾아갔지만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깡통에 밥을 꾹꾹 눌러 담아 준 점촌 조그만 식당집 아주머니, 가로수 나무 밑에 쓰러져 있을 때 두레박에다 물을 길러 헐레벌떡 달려와 먹여 주시던 그 할머니의 얼굴도, 배 삯이 없다니까 그냥 강을 건너 주시던 뱃사공 할아버지도 좀처럼 내 기억엔 지워지지 않는 얼굴들이다. 이처럼 곳곳에 마음 착한 사람들이 있기에 나는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종로서적, 220쪽)
이런 은혜의 삶을 경험케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금식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 가지의 축복으로 역사하십니다.
첫째는 물댄 동산 같은 형통함의 축복입니다.
58: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58: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58: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58: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형통함의 축복입니다.
또 하나의 축복은 평화(화평)의 왕이 되는 복입니다.
58:12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이것을 새 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너의 백성이 해묵은 폐허에서 성읍을 재건하며, 대대로 버려두었던 기초를 다시 쌓을 것이다. 사람들은 너를 두고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 이라고 부를 것이다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 곧 평화의 왕으로 우리를 세워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골에서 상여가 나가는 것 보셨습니까?
상여 나갈 때 부르는 소리 중에 ‘향두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상여가 나갈 때 상여머리를 잡은 선소리꾼이 상여 위에서 방울 종을 흔들며 먼저 노래를 매깁니다. 그러면 밑에 있는 상두꾼들이 그 소리를 받아 후렴으로 부르는 노래가 있는데 그것이 <향두가>입니다. 그 노래의 일부 중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인간 세상 태어나서 무슨 선심하였는가 배고픈 이 밥을 주고 지성공덕하였는가
헐벗은 이 옷을 주고 불안공덕하였는가 깊은물에 다리 놓고 월천공덕하였는가
목마른 이 물을 주고 활인공덕하였는가‘
참 신비하고 놀라운 것은 ‘향두가’의 이 가사가 복음서의 종말장인 마태복음 25장의 말씀과 꼭 일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깊은 물에 다리놓고 월천공덕(越川功德) 하였는가’입니다.
월천공덕이란 깊은 물을 건너도록 해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징검다리를 놓아주든, 아니면 든든한 다리를 놓아주든, 아니면 뼈까지 시려오는 냇물에 발을 담근 채 업어서 건네주든, 사람들이 서로 왕래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월천공덕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과 사람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잇는 징검다리와 같은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이라는 새 이름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근사하고 멋있는 인생입니까?
말씀을 마칩니다.
신앙은 종교적인 의례를 포함하지만 종교적인 의례 그 자체가 신앙은 아닙니다.
구제생활과 기도생활과 금식생활과 같은 종교적인 의례(행위)가 우리 신앙의 도움이 되는 도구가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행위 자체가 신앙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행하는 종교적 의례(행위)를 신앙으로 착각한다면 그 때부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바리새인과 같은 외식하는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바라기는 외식하는 자의 금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의 금식으로 말미암아 물 된 동산 같은 형통함의 축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이라는 새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날이 좀 풀리면서 요즈음 부적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이 다이어트입니다.
체중감량이지요.
몸 안에 있는 기름기 즉 체지방을 빼는 데 관심이 참 많습니다.
다이어트,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택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여론조사에 의하면 밥을 굶은 단식이라고 합니다.
물론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 다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어트하면 운동보다는 밥을 일부러 굶는 단식을 제일 먼저 생각한다고 합니다.
생명을 위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먹는 것과 마시는 것입니다.
즐거움 중에 최고의 즐거움은 먹는 즐거움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인간이 가진 본능 중에 본능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일부러 끊는다는 것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배고픔을 뼈저리게 체험해본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만 해도 밥 먹고 사는 것이 우리나라의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는 분들에게 단식과 금식이라는 말은 언어유희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크게 세 종류로 나뉩니다.
첫 번째 경우는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단식이 있습니다.
주로 사회적 약자인 사람들이 마지막 몸부림으로 하는 행동이 단식입니다.
비폭력 무저항 운동의 상징인 마하트마 간디가 그 대표적인 인물일 것입니다.
두 번째 경우는 종교적인 이유인데 자아실현을 위한 단식이 있습니다.
모든 종교에서 행하는 단식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자아의 죽음이지요.
오늘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금식은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거나 자아실현을 위한 수행으로서의 단식이 아니라 자아의 죽음으로서의 금식입니다.
자기 부인, 곧 자아의 죽음을 위한 금식을 말합니다.
죽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 은혜만을 기다리며 정말 죽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병 고침 이라든지 능력이라든지 어떤 거래가 존재할 수 없는 금식 그 자체를 말합니다.
이슬람 사람들은 ‘라마단’ 기간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금식을 합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던지 그들은 철저하게 그 계율을 지킵니다.
금식이라는 행위만으로 보면 그들을 단연 최고입니다.
물론 우리 교회도 사순절만 되면 하루 한 끼 정도 금식하는 이들이 꾀 있습니다.
더러는 예수님처럼 목숨 걸고 40일 금식 기도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이런 분들 있습니다.
문제는 과연 그분들이 그 금식을 통해 자기 부인 즉 자아의 죽음을 경험했는가?입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리 목사님은 금식을 은혜(총)의 수단 가운데 하나로 열거했습니다.
맞습니다. 금식은 은혜의 수단입니다. 아주 강력한 은총의 수단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은혜의 수단인 금식을 자기 소원(자신의 꿈)을 성취시키는 성취의 수단으로 왜곡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금식에 대한 무지로 인해 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병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금식에 대한 바른 성경적 이해가 중요합니다.
'말씀풀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복음17:14-20 이제 산을 옮겨볼까요? (0) | 2019.01.11 |
---|---|
요한복음 12:20-26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0) | 2019.01.11 |
요한복음11장23-44 돌을 옮겨 놓으라 (0) | 2019.01.11 |
로마서 6:8-14 순전한 그리스도인 (0) | 2019.01.11 |
누가복음 13:10-17 아브라함의 딸 (0) | 2019.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