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옮겨 놓으라
요한복음11장23-44절 2014/04/20주일오후예배
11: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11: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11: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11: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11: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11: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11: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11: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11: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11: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11: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1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11: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질문하나 드리죠.
예수님의 제자는 열둘 입니다. 그러면 공자님의 제자는 모두 몇 명입니까? 열 명입니다.
공자님의 제자 열 명을 가리켜 ‘공문십철(孔門十哲)’ 또는 ‘사과(四科)십철’이라고 부릅니다.
공문십철 중에 하나인 계로(季路)가 어느 날 스승인 孔子에게 이런 질문을 드립니다.
論語, 先進編 11章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선생님 죽은 귀신을 어떻게 섬겨야합니까?”
공자님말씀.
“살아 있는 사람도 제대로 섬기질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까?”
‘귀신을 섬긴다.’
‘죽은 조상을 섬긴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계로가 다시 질문을 드립니다.
“그러면 선생님 죽음이 무엇입니까?”
그 때 공자님이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아! 아직 삶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겠는가?”
참 솔직하지요.
얼마나 솔직합니까?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고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세상에서 감히 죽음을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창조주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만이 죽음 곧 사망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무력한 인간은 죽음의 문제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명 ‘부활장’이라고 부르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공포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57절입니다.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15: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새 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15:55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15:56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15:57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죽음을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능력도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거론하지 않고는 죽음도 생명도 결코 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이 세상에서 죽음을 생명으로, 사망을 승리로 바꾼 분이기 때문입니다.
믿어지십니까?
‘부활’ 그러면 아직도 죽음 이후, 먼 미래에 일어날 어떤 사건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물론 오늘 본문 24절에서 마르다가 말한 것처럼 마지막 날의 부활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죽은 자의 마지막 날의 부활이 그릇 됐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자 한 것은 부활의 현재적 삶과 그리고 부활 신앙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삶입니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반쪽짜리 부활신앙이 아니라 온전한 부활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아주 중요한 질문 하나 드리지요?
주님의 부활하심이 지금 나의 부활로, 새 생명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는지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주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로 이어져야합니다.
비록 2000년 전에 일어났던 주님의 부활 사건이지만, 그 부활 사건으로 말미암은 새 생명의 역사가 지금 나와 상관이 있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경험되어지고 누려지는 부활신앙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현재의 부활신앙입니다.
부활절을 절기예배와 절기행사로만 머물게 하지 말고, 부활신앙으로(생명신앙으로) 오늘을 사는 것에 좀 관심을 가져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오늘 나의 부활로 생생하게 경험해 보는 것입니다. 百聞이 不如一見이라는 말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면, 이제는 百聞이 不如一行,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 핵심은 어떻게 사는 것이 부활신앙으로 사는 것일까? 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좀 고민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 고민의 해답을 저는 오늘 본문이 기록된 요한복음 11장에서 한번 찾아보고자합니다.
자신을 돌려 치려고 하는 유대인들을 피해 예수님이 요단 강 건너편에 머물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베다니 마을에 살고 있던 마르다 마리아 자매가 인편을 통해 다급한 소식 하나를 전해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 곧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 소식을 접한 예수님이 이해할 수 없는 말씀과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 4절입니다.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
이해가 되십니까?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지 않지요.
분명 무슨 깊은 뜻이 숨어 있는 말씀 같은데,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움 말씀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일부러 이틀이라는 시간을 지체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예수님의 행동입니다.
상황으로 봐서 지금 그럴 때가 아니지요.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일부러 이틀을 지체합니다.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이런 선생님을 바라보면서 제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겠습니까?
‘아하 죽음의 위협(돌) 앞에서는 장사가 없구나.(10장31절) 말로만 형제자매지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예수님도 별수 없구나!“
이런 것들이 제자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예수님이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십니다.
11: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죽음의 위협(돌) 앞에서는 장사가 없는 줄 알았는데..
‘다시 자신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 유대 지방으로 가자’
제자들이 볼 때 더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립니다.
11: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유대로 가자는 것은 곧 죽으러 가자는 말인데,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이틀이라는 시간도 지났으니 그만 포기하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결심은 아주 단호합니다.
‘가자’는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나사로의 집을 찾아가기는 갔는데 문제는 17절입니다.
11: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죽은 지 며칠이 지났습니까?
나흘입니다.
그러면 왜 하필 사흘이 아니라 나흘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에 예수님이 오셨을까요?
나흘이라는 시간, 좀 냄새가 나지요?
이것이 오늘 본문을 푸는 열쇠입니다.
나흘, 숫자 4 여기에 무슨 비밀이 있을까요?
그러기 보니 4와 관련된 사건이 성경에는 꽤 많이 등장합니다.
중요한 사건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 40일.
창세기 8장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심판에서 밤낮으로 사십일 동안 비기 내리다가 사십일이 지나서야 비가 그칩니다.
호렙산에서 행한 모세의 40일 금식.
그 후에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받게 됩니다.
광야 40년.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생활 40년이 지나서야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성합니다.
예수님의 40일 금식.
40일 금식과 더불어 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후에, 그 때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지요.
그러고 보면 4라는 숫자 결코 좋은 이미지의 수는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큰 역사를 위해서는 반듯이 거쳐야 하는 수가 4라는 숫자입니다.
그렇다면 왜 나흘인가?
죽은 지가 이미 나흘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유대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사흘이 지나면 완전히 몸을 떠났다고 믿었습니다.(우리와 동일)
그러니까 사흘에서 하루가 지난 나흘이 되었다는 말은 그의 영혼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강을 이미 건넜다는 말이 됩니다.
돌이킬 수 없는 절대 사망, 절대 절망입니다.
‘엘 샤다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대 사망, 절대 절망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절대 절망에 빠진 마르다에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1: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부활, 즉 ‘다시 살아남’을 선포합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합니다.
11: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지막 날 곧 부활의 때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안다는 것입니다.
마르다, 즉 유대인들의 부활신앙, 이것이 문제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마지막 날에 곧 종말에 일어날 먼 미래의 사건으로만 이해한다는 것. 이것이 부활에 관한 유대인들의 그릇된 견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참된 부활에 관한 아주 중요한 말씀을 우리에게 남기십니다.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지막 날 곧 종말의 부활이 아니라 살아서 믿고 경험되어지는 현재적 부활의 삶입니다.
바로 성령으로 거듭난 새 생명의 삶입니다.
신ㅊ지 ㅇㅁ희 교리중의 핵심교리인 종말에 나타나는 육체의 영생불사가 아니라 부활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을 새롭게 소유한 부활의 삶을 지금, 살아서 맞이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정말 주님의 부활을 살아서 맞이하고 있다면, 죄와 사망의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처럼 절망의 무덤, 죄의 무덤, 사망의 무덤에서 벗어나 새 생명의 능력, 그 주님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어지십니까?
요즈음 여기저기서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고 말합니다.
물론 교회 밖에서 부활의 신앙을 경험하지 못한 분들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새 생명으로 거듭났다고 하는 그리스도인이 여기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나흘이라는 절대 절망의 무덤, 나흘이라는 절대 절망의 돌문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39)’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절망의 돌, 불신앙의 돌을 옮겨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百聞이 不如一見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하고 믿었다면
百聞이 不如一行
이제는 그 부활의 능력으로 생명의 능력으로 다시 일어나 걸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나흘이라는 절망의 무덤, 나흘이라는 불신앙의 돌문에 갇혀 썩은 내 풍기는 인생을 더 이상 살지 말고 다시 살아난 나사로처럼 무덤에서 생명으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수족과 여러분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절망의 끈, 불신앙의 끈을 벗어던지고 이제는 자유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을 마음껏 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는 오늘의 부활신앙, 부활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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