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요한복음 12:20-26절 2014/4/6(주일)
12: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12: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12: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유대인의 명절이 가까이 왔을 때 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대인의 명절이란 유대인 최고 명절인 유월절을 말합니다.
유대인의 관례(관습)의 따라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공생애에서 보낸 마지막 유월절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유월절 행사 그 자체보다는 나사렛 출신의 한 전도자 예수님에게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심지어 헬라 여러 지역에서 온 이방인들에게까지 모든 관심은 갈릴리로부터 온 나사렛 사람 예수님에게로 향한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그 이유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12: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12:18 이렇게 무리가 예수를 맞으러 나온 것은, 예수가 이런 표징을 행하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런 표징이란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그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
베다니 마을에는 예수님의 제자만큼 중요했던 세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입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만 나사로가 병들어 갑자기 죽게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장사를 마치고 무덤에 갇힌 나사로, 그 청년 나사로를 우리 주님이 살리십니다.
죽은 자, 그래서 이미 장사하여 무덤에 묻힌 자를 살리신 것입니다.
11장 39절부터 보겠습니다.
1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1: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 기적, 이 표징(세메이온)의 이야기가 유월절을 앞두고 온 사방으로 퍼진 것입니다. 그러니 그 기적을 일으키신 당사자, 그 주인공이 예루살렘에 드디어 입성한다고 하니 군중들이 몰려들었을 수밖에 없었다고 저자 요한은 아주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하지만 경건한 바리새파 사람들, 전통파 유대인들은 이러한 현상을 아주 불쾌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모세의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본질보다는 신비주의로, 기적주의로 군중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고 여기는 예수님의 행동 때문입니다.
모세가 정해 준 전통적 신앙인 유월절보다 나사렛 출신 예수라는 무명의 촌사람이 행한 기적에 군중들의 시선이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하나님 말씀에 충실했던 전통파 유대인들, 오직 율법, 오직 하나님만을 신앙의 전부로 여겼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아주 불쾌하게 받아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 구원의 역사, 이 표징을 누가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바리새인들마저 이런 말로 하나님의 역사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12: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이 말끝에서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12: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여러분, 이 대목이 참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명절입니다.
유대인의 명절이라는 것은 유대인만이 참여할 수 있는 명절이 유월절입니다.
참여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참여할 수 있는 절기가 아닙니다.
모세의 율법에 어긋난 사람은 참여 할 수 없는 절기가 유월절입니다.
이러한 전통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아주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 즉 그리스 사람 몇이 있었다고 본문은 증언합니다.
다른 복음서에 없는 오직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아주 독특한 증언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전을 찾은 그리스 사람, 헬라인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사실 정확한 설명을 불가능합니다.
유대교에 관심이 있거나 개종한 이들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어디에서 그들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유대인이 아닌 그들도 성경이 오래 전에 예언했던 메시야, 즉 이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를 유대인들 못지않게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익명의,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리스 사람 몇이 예수님을 찾으러 나섭니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사람이 벳새다 출신 예수님의 제자 빌립입니다.
그리고는 빌립에게 이런 부탁을 합니다.
12: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고 하는 그 예수님, 우리가 그 예수님을 꼭 찾아뵙고 싶으니 그러니 예수님의 제자인 당신이 주선 좀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빌립은 이 일을 그의 절친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와 상의한 후 둘이 함께 예수님께 나아가서 그들의 부탁을 전합니다.
사실 이 부분도 참 재미있는 단락입니다.
왜 하필이면 빌립과 안드레였을까요?
이 이야기 어디에서도 수제자 그룹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빌립(빌립보, 필리포스)과 안드레(안드레아)일까요?
이들의 이름이 다른 제자의 이름과 달리 그리스식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사람과 함께 빌립과 안드레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그리스 사람들과 만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 만났다면 그들과 어떠한 대화의 내용을 나누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이 이 이야기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표징)과 함께 언급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19절에서 바리새인들이 말한 것처럼 온 세상이 심지어 이방인마저도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 넣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전한 천국 복음이 드디어 온 세상이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처럼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임하는 날이 드디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요한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이 부분을 아주 강조하십니다.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임하는 날이 드디어 왔다는 것입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받을 때)가 왔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실 때가 드디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곧 육체의 죽음이 멀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는 말을 쉽게 번역하면 ‘이제 내가 죽을 때가 이르렀다’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알쏭달쏭한 표현을 썼을까요?
‘이제 내가 죽을 때가 이르렀다’하면 될 것은 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받을 때)가 왔다.”는 어려운 표현의 말씀을 하셨을 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여느 사람의 죽음과는 좀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이 짧은 구절 속에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담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죽음은 압도적인 힘, 즉 세상의 권력 앞에서 굴복한 패배자의 비극적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죽음은 삶의 박탈이 아니라 참된 삶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죽음은 사망을 넘어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나아가는 매개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을 하나님과 결합시키고, 그리고 나뉘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결합시키는 촉매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째, 그러하기에 예수님의 죽음은 어둠과 절망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영광이 된다는 것이 요한의 해석입니다.
이것이 ‘이제 내가 죽을 때가 이르렀다’라는 쉬운 말을 사용하지 않고,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라는 어려운 말로 예수님이 사용한 이유입니다.
‘영광’
영광을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독사doxa'입니다.
사람에게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단어가 ‘독사’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을 사망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영광(독사)이라고 표현한 것은 자신의 죽음이 곧 새로운 창조, 새로운 구원의 시작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깊은 주님의 말뜻을 제자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상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 단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들처럼 어리둥절해 하는 제자들에게 쉬운 비유를 하나 들려주십니다.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아주 짧은 비유입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말씀을 적용할 때 나 자신에게 적용하기보다는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하기 위해 적극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먼저 그렇게 하면 나도 따라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이 먼저 죽는 밀알이 되려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대속의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이 먼저 죽는 한 알의 밀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 그 희생과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첫 열매가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헌신을 통해 때로는 희생을 통해 나처럼 너희도 하나님의 영광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 우리 교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 희생과 헌신의 자리, 그 영광의 자리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듣고도 주저하는 우리들을 위해 비유 하나를 더 들어 말씀하십니다.
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자기 욕심을 버리고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만이 영생에 이르는 영광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이 대목(25절)을 아주 적극적으로 해석해 놓았습니다.
“앞뒤를 재지 않는 사랑으로 그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광입니다.
앞뒤 재지 않는 사랑, 그래서 자신의 목숨마저도 버리는 사랑,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26절의 권면, 오늘 말씀의 결론을 꼭 받아들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제가 새 번역으로 읽어 드립니다.
12:26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하늘의 영광, 그 영광의 자리로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앞뒤 재지 않는 사랑, 그래서 자신의 목숨마저도 내 버리는 사랑, 바로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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