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산을 옮겨볼까요?
마태복음17:14-20절 2014/3/23(주일오후)
17:14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17: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7: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17: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7: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1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점심 맛나게 드셨는지요?
이제 남은 것은 휴일 오후에 즐길 수 있는 낮잠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여러분과 저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미션이 주어졌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과 그리고 그 전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식곤증이 밀려오는 시간이지만 잠시 집중해서 말씀을 나눌까합니다.
지난 금요기도회 시간과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역시 변화산 사건과 연결된 말씀입니다. 이미 이 본문과 관련해서 목사님이 한 번 설교하셨고 그리고 선교사님이 또 한 번 전한 말씀입니다. 이미 두 번 설교한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가 이 본문을 또 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변화산 사건 즉 신비주의만을 바라는 신앙으로부터의 탈피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세메이온’ 즉 표적으로서의 기적(신비)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 즉 썩어 없어질 이 세상의 유익만을 구하는 기적, 그 기복적인 신앙으로부터 이제 좀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물론 신앙은 신비 그 자체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그 자체가 신비입니다. 문제는 그 신비가 증거 하는 대상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인지? 아니면 이 땅에 그 어떤 것인지 이것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방언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 때 저는 그 은사가 최선이고 최고인줄 알았습니다. 제 2의 조용기 목사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신학을 좀 더 깊이 공부하고 성경을 좀 더 깊이 탐구하다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카리스)보다 더 큰 은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은사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이 부분을 아주 비중 있게 다릅니다.
13:1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13:3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13:5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13:6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13: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가장 갖고 싶은 은사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친절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하는 사랑입니다.
저는 이 은사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정말 원합니다.
사랑의 은사, 이 은사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을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변화산 위만이 아니라 변화산 아래 즉 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절함. 그 아픔에 우리 교회가 좀 더 관심을 기울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들의 신음, 그 아픔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비정규직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노점 상인과 같은 가난한 이들, 외국인 노동자 외국인 신부같은 나그네 된 이들, 고와와 과부 같은 외로운 이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의를 위하여 모욕과 박해를 받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통곡에 우리 교회가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교회가 통곡의 벽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한 때 명동성당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교회도 그들의 피난처, 그들의 도피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희망이 되고 예수님이 답이 되지 않겠습니까?
변화산 사건 이후에 나오는 고통 받는 아이의 아버지와 예수님의 대면은 오늘 본문뿐만 아니라 마가복음 9장 그리고 누가복음 9장에서도 동일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그 아이가 귀신(프뉴마pneuma, 악한 영)에 들렸다고 일관성 있게 말하고 있지만(막9:17, 눅9:39). 오늘 본문을 기록한 마태복음은 이 아이가 간질병에 아주 심하게 들었다고 말합니다.
17: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간질, 헬라어로 ‘셀레니아조마이seleniazomai’라고합니다.
그 단어를 직역하면 '달의 기운(즉 어둠의 그림자)에 사로잡혔다'는 뜻이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이곳과 마태복음 4:25에서만 사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왜 이런 단어를 굳이 선택했을까요?
사실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서가 시리아 지역(시리아 문화권)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추정 해 볼 때, 유추할 수 있는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시리아 지역에 만연하고 있었던 달신(Sin) 숭배 사상 때문입니다. 달의 형태가 정기적으로 바뀌는 것처럼 달의 기운에 정기적으로 사로잡혀 그 아이의 상황과 형편도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다른 공관 복음서와 달의 기운데 사로잡힌 것으로 ‘셀레니아조마이seleniazomai’라는 간질로 표현한 것입니다.
어쩌면 당시에 그릇된 종교적 관념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을 향한 마태의 숨은 의도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그 아이는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힘은 이 아이에게 아주 부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공간인 불 속에 뛰어들기도 하고, 물 속에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그곳이 자신을 사망으로 인도하는 죽음의 공간인 줄도 모르고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아이의 행동을 날마다 지켜보는 그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찢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가닥 희망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온갖 병을 고치는 자요, 귀신 축출자로 이미 소문이 파다한 그 나사렛 사람 예수가 자기 마을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을 만나러 한 달음에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급한 마음에 그 아버지는 그의 제자들에게 아이의 치유를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선생님과 달리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이 등장하신 겁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예수님은 깊은 탄식을 내뱉었습니다.
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17)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제자들의 무능함이 오늘 우리, 우리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요?
세상은 오늘 우리 교회를 통곡의 벽을 삼아 기도하러 다가오는데 우리는 그 어떤 능력도 그 어떤 표적도 보여주고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시름이 깊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믿음 없음과 패역함, 믿음 없음과 비뚤어짐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패역한 행동과 믿음 없음, 비뚤어진 행동과 믿음 없음을 같은 선성에서 놓고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과 그에 따른 행실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믿음 따로 행실 따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가끔 기도할 때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맡긴다고 아룁니다.
그러면서 손 놓고 있습니다.
마치 이것이 믿음이 좋은 이의 말과 행동 같지만 때로는 이러한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마음을 속상하게 해드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가 언제나 자신만을 의존하기기를 바라는 만큼 또한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스스로 선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는 주님의 답답한 마음을 귀 담아 들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입니다.
17: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마태는 예수님이 귀신을 꾸짖어 내쫓았다고 간결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꾸짖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귀신보다 더 큰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의 제자라고 하는 우리는 사회적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고, 악한 영들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꾸짖어 내쫓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권위의 상실에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죄와 악을 향해 꾸짖는 영적 권위의 상실입니다.
여러분 그 권위를 회복하십시오.
그래야 교회가 삽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영적 권위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지난 시간에 말씀 들었던 마가복음 9장에서는 ‘기도 외에는’ 입니다.
회복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 외에는 이런 영적 권위를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이 마가복음을 쓴 마가의 처방입니다.
반면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의 처방은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제자들이 묻습니다.
17: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렇게 제자들이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님이 답을 주십니다.
1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산을 옮길만한 즉 불가능을 가능하게 할 만한 산 믿음입니다.
겨자씨 한 알 만큼만이라도 살아 있는 믿음의 불씨가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믿어지십니까?
하지만 이런 설교를 할 때마다 이런 반문을 하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믿음 하나 만으로 이 산을 저리로 옮길 수 있다고?’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조롱합니다.
과연 불가능한 일일까요?
우리 주님이 그저 해보신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님은 이 문제를 ‘너 자신을 혁명하라’는 책에서 이렇게 풀었습니다.
“산을 움직이는 믿음은 사실은 나를 움직이는 믿음이다. 산보다도 더 무거운 것은 내 몸이다. 산을 참말 움직일 수 있어도 내가 나를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그런데 내가 믿기만 하면 산이라도 옮겨갈 것이다 하고 내 믿음을 믿으면 산보다도 더 무겁고 험하던 내 몸이 언젠지 모르게 움직여진단 말이다. 움직여진 줄도 모르게 움직여진다. 그러므로 산이 움직여진 것으로 보인다.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잘 부리는 사람은 하루 동안에 열 스물의 산봉우리를 내 발 밑으로 지나가게 할 수 있으나 내 몸을 잘 부리지 못하는 사람은 머리 앞의 책도 일 년을 가도 못 읽고 만다. 그러나 산을 옮기자 해서 산더러 여기서 일어나 저 바다 속으로 가거라 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내가 나더라 옮겨가라고 명령을 해야 옳은 일이다. 어디로 옮겨가란 말인가? 하나님께로다."(<너 자신을 혁명하라> 중에서)
어떻습니까?
제자들에게 요구하셨던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겨자씨 한 알 만큼만의 믿음, 그 믿음의 실체가 분명해 지셨는지요?
말씀을 마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앞에는 움직여야 할 거대한 산들이 참 많습니다.
그것이 질병일 수도 있고 그것이 가난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꿈과 비전 그리고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져야할 우리의 희망과 소망을 가로 막는 거대한 산들이 참 많습니다.
마치 우리의 꿈과 희망을 비웃는 듯 압도적으로 거대한 산의 그림자가 우리의 삶을 뒤 덥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도 삶을 포기하지도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이 살아 있는 한, 그 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겨자씨 한 알 만큼만이라도 살아 있는 믿음의 불씨가 있으면 됩니다.
그러니 우선 막연하더라도 믿음을 구하십시오. (믿음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이라고 찾아내십시오.
그래도 안 되면 하나님의 문을 세차게 두드리십시오.(호산나, ‘제발 나 좀 살려 달라’고 기도하시고 또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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