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고린도후서 5:16-21 그리스도의 사신(使臣)

心貧者 2019. 1. 11. 14:32

그리스도의 사신(使臣)

고린도후서 5:16-212014/2/16()

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5: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5: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지칭합니다.

17절입니다.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

여기서 말한 새로운 피조물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부활의 생명, 그 영원한 생명의 가치에 잇대어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바울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삶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be in Christ’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하는 사람.

그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 존재의 가치가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다고 했을 때 우리 삶에서 제일먼저 변화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을 바라보는 눈, 그 눈의 기준이 달라집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이전에는 어떻습니까?

육신의 잣대, 곧 그가 가진 것(what they have)이나 외적 조건(how they look)을 보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어느 학교 출신이냐, 어떤 집안사람이냐,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느냐, 어떤 옷을 입고 있느냐가 그 사람을 바라보는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면 이런 것들이 무의미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잣대가 아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새로운 하나님의 잣대가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보신 것처럼 외모가 아니라 사람의 중심 곧 그 안에 있는 생명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은 세상 사람을 볼 때 심판의 대상이나 멸망의 대상이나 미움의 대상이나 정죄함의 대상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종교와 다르고 우리의 생각과 다르고 우리의 신념이나 가치가 다르다 할지라도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신 것처럼 구원의 대상, 건짐의 대상, 위로의 대상, 긍휼함의 대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주님이 이 땅에서 행하셨던 하나님 나라로 이끄는 구원의 역사에 우리도 동참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노릇만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집사 노릇, 권사 노릇, 장로 노릇, 목사 노릇이나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가치 있고 중요한 일입니다.

요즈음 벌어지고 있는 교회의 형편을 볼 때 사실 이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 이상의 것을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전과 다른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입니다.

교회 안이든 교회 밖이든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가치 있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이전과 다른,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가치 있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세상과)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5: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5: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우리에게 하나님이 부탁한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무엇입니까?

화목을 일구는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는 것입니다.

'make peace', 평화를 만드는 그리스도의 사신입니다.

샬롬의 소식을 전하는 평화의 전령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화목(샬롬)이고 둘째는 죄로 가득한 세상과의 화목(샬롬)입니다.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두 가지의 화목을 말씀 드렸습니다.

하지만 실은 한 가지입니다.

한 가지의 진리를 두 개로 나누어서 설명한 것뿐입니다.

, 하나님과 화목과 세상과의 화목을 나눌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화목 하는 자는 죄로 가득한 세상과 화목 하는 자고, 죄로 가득한 세상과 화목 하는 자는 하나님과 화목 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신이 된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해야 할 첫 번째 소명이자 첫 번째 사명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이 쉽습니까?

아니면 죄로 가득한 세상 즉 눈앞에 사라지지 않는 원수와 화목 하는 것이 쉽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이 더 쉽지요?

그래서 여러분의 화목이, 하나님과의 화목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그 증좌로(증거물로) 원수와의 화목을 내 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유념하셔야합니다.

 

그래서 주기도문 몸말에 이런 문구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6:12)

 

공동번역입니다.

6:12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자세히 보세요.

무엇에 대한 간구입니까?

우리에게 죄지은 이들,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 즉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이들과의 화목입니다. 이 말씀의 원문을 직역하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해 집니다.

6:12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의 빚을 완전히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완전히 없애 주시고

 

여기서 말하는 빚이란 단순히 물질의 빚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원한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하루는 저희 어머니가 손의 핸드폰을 들고 차에 타시더니 핸드폰이 없다고 막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어머니 손에 있잖아요.’

그 때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 이상하지, 이렇게 깜박 깜박해도 이제는 잊어도 될 만한 옛날의 섭섭한 일들은 하나도 잊어지는 법이 없으니 참 신기하지?’

 

그렇습니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 특히 나에게 죄를 지은, 나에게 빚을 진 원수와 화목을 이루며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뜻과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기도로까지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빚진 사람의 빚을 완전히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완전히 탕감하여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죄와 한으로 가득한 이 척박한 땅에서 평화(샬롬) 싹을 틔우는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사신, 그러면 생각나는 이 시대의 어른이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분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민주주의 거목, 통일운동의 기수또는 좌빨의 원조

하지만 저는 그분을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 시대의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신이라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용서의 사신, 화해의 사신, 통일의 사신으로 철저하게 사신 분이 바로 그 분입니다.

 

물론 그분이 처음부터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용서의 사신, 화해의 사절로 사셨던 것은 아닙니다. 해방이후 성공한 젊은 사업가로서 정치권력에 대한 야망을 가졌던 속된 사람 중에 속된 사람이 인간 김대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게 하신 분이 계십니다.

첫 번째 부인을 사별 한 후에 얻은 지금의 부인 이희호 여사입니다.

연세대 앞에 있는 창천감리교회 원로 장로님이십니다.

이희호 장로님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다섯 차례의 죽을 고비와 6년간의 감옥 생활 그리고 10여 년간의 걸친 55회의 가택 연금 등 수없이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를 지탱해준 힘은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신앙이었습니다.

80년대 초, 감옥에 갇혀 있던 그가 아내와 자녀들에게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옥중서신이지요.

이것이 나중에 김대중 옥중서신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책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분입니다.

 

크리스찬이 된 행복은 무어라 해도 남()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웃 특히 고난 받는 사람들에의 사랑의 마음과 봉사를 주님의 뜻으로 행하는 기쁨일 것이오.”(35)

 

사랑하려면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려면 상대의 처지와 심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해하려면 상대방의 처지와 심정을 알기 위한 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대화도 이해도 없는 가운데 곡해와 무지가 쌓여있는 가운데는 용서도 사랑도 있기 어렵습니다.”(143)

 

하나님의 축복이란 평탄한 생활과 번영의 보장이 아니다. 그것은 어떠한 고난 역경 실패 속에서도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가능성 앞에 서는 힘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202)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빛은 암흑의 권세와 싸워야 하고, 부패의 힘과 싸워야 한다. 그러므로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은 시련과 고난의 생활을 의미한다.”(286)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이 책은 1984년에 출판되자마자 곧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판매금지가 됩니다. 그래서 1984년판 책을 시중에서 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다가 2009년에 이 책이 한울 출판사에서 다시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보시기 바랍니다.

 

이 책에 담겨진 편지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하나 같이 한 인간으로 그리고 세 아들의 아버지로 그리고 한 아내의 남편으로 진실하게 살고자했던 한 그리스도인의 순수함과 열망이 잘 묻어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가 대통령이 되어 정치 보복을 차단하고 관용과 포용을 역설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신앙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 김대중은 민주주의의 거목, 통일운동의 기수이기 이전에 정치 이념 분쟁으로 가득한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용서의 사신, 화해의 사절로 사셨던 그리스도의 사신이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제가 이태원에 있는 이슬람 사원을 방문했을 때에 일입니다.

터키 출신 이맘(아랍어 지도자, 모범)의 안내를 받아 그들의 예배와 기도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예배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고 합니다.

예배 자와 예배 자 사이의 어깨는 항상 빈틈이 없을 정도로 딱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배 자와 예배 자 사이의 어깨에 틈이 벌어지면 그 틈을 타서 마귀가 역사한다고 그들은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빈틈, 단절은 곧 마귀의 역사를 뜻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이런 도전을 줍니다.

단절된 세상, 단정된 나라, 단절된 관계를 용서로 이어주고 사랑으로 메꾸어 주는 그리스도가 보낸 사신’ ‘그리스도가 보낸 사절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신입니다.

원수로 가득한 이 땅에 평화를 일구는 그리스도의 사신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죄로 인해 단절 된 빈틈을 메꾸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서로의 흠을 사랑으로 메꾸십시오.

단절됨으로 마귀에게 빈틈을 보이지 마십시오.

그래야 우리 교회공동체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 희망이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