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누가복음 2장42-50 잃어버린 예수를 찾아서

心貧者 2019. 1. 9. 23:24

잃어버린 예수를 찾아서

누가복음 242-50                                                      2015/3/13()

2: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2: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2: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2: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2: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2: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2: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2: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2: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우리나라는 남성 위주의 봉건사회였습니다.

그 때는 여성의 지위나 여성의 인권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이름 석 자도 허락되지 않았던 시절이 그 시절입니다.

그저 그들에게 주어지는 이름은 이씨부인, 김씨부인, 수원댁, 영월댁, 춘천댁, 과부댁 정도입니다.

이름이 있다 해도 섭섭이, 종네, 끝년이, 종말이 수준입니다.

 

첩을 둘 수 있었던 축접 제도가 공인되는 사회에서 여자는 말 그대로 부엌데기입니다. 군말 없이 밥 잘하고 빨래 잘하고 애 잘 낳으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들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찾아 준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 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여자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처음으로 이름을 찾아 준 것입니다.

 

한국교회 선교초기 교회 여성들의 이름은 주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세례를 줄 때 지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초창기 한국교회 여성들의 이름을 보면 좀 낯섭니다.

김세지(평양에서 활동했던 전도부인, 서양식이름 세디, 이것을 한자 세지로 음역해서 사용)

여메례(세례명 메리를 한자 메례로 음역),

박에스더(한국최초의 여성의학박사, 원래이름 점동)

주룰루(무당집 딸에서 해주지방 전도부인, 원래이름 주포기)

노살롬(시누이  또라, 올케 살로메)

하란사(한국인최초 미국대학문학사, 세례명 낸시 이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란사)

생소하지만 여자들의 이름을 처음으로 찾아 준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평양에서 전도부인으로 활동했던 김세지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집안일이 바쁜 중에도 그의 가르쳐 주는 대로 틈틈이 쓰기와 읽는 것을 연습하며 성경공부에 열심한 결과 부인이 평양 오시던 해(1896) 10월에 드디어 노블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세듸(sadie)'라는 이름을 얻었다. 나의 이름은 그의 부인이 지어 준 것인데 오랫동안 이름이 없이 살던 나는 주의 은혜를 힘입어 세례 받던 날로부터 여자 된 권리 중 에 한 가지를 찾게 되었다. 이로 보면 조선 여자의 해방은 우리 그리스도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만하다.’

이처럼 남성 위주의 봉건사회에서 잃어버린 여자들의 이름과 존엄성을 찾아 준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지요.

사람에 대한 가치, 영혼에 대한 가치, 생명에 대한 가치.

언제부터인가 우리 교회가 이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위에 세워진 곳이 교회입니다.

누가복음 4장을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주의 성령 곧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에게 임하자 드디어 공생애를 시작하시는데, 주로 행하신 일 세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둘째,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그리고 셋째,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여기에 등장하는 우리 주님의 선교 대상은 비교적 아주 명확합니다.

소위 사회적 양자라라고 하는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 먼 자입니다.

가난하다는 말은 그리스어로 포토코스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사흘에 한 끼도 먹기 어려운 극빈자를 말합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그 선교 대상이었습니다.

 

돈 때문에, 빚 때문에, 건강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 곧 잃어버린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회복시켜주시기 위해 이 땅에서 몸부림치신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입니다.

돈 때문에 가난한 자도, 전쟁 때문에 포로 된 자도, 죄 때문에 눈먼 자도, 질병 때문에 눌린 자도,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접 받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을 이 땅에 하나님 나라로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의 가치에 목숨 거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교회가 이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에 대한 가치, 영혼에 대한 가치, 생명에 대한 가치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핏 값으로 사신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이, 그 영혼의 가치가 송두리째 뿌리 뽑히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교회 안에서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말하면 좌파니 빨갱이니 하는 소리를 듣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생명이라는 영적인 목표보다 물질이라는 삶의 수단을 중시하는 저급한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생보다는 수단에 불과한 교회 건물에 더 가치를 두는 치졸한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왜 우리 교회가 가장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 되고 말았을까요?

그리스도의 복음과 거리가 먼 교회의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고 바라보아야할까요?

사실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잃어버린 것, 무엇입니까?

인정하기 실지만 오늘 본문의 이야기처럼 바로 예수님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 첫 번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게 됩니다.

절기의 축제가 마치자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일행은 다시 고향을 향해 길을 떠나게 됩니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아버지 요셉이 친지 어른들과 앞서가고 어머니 마리아와 어린 예수가 뒤쳐져서 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지게 됩니다.

당연히 동행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어린 예수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두 시간 지나서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하룻길을 가서야 어린 예수가 동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하룻길을 다시 되돌아 와서 이틀이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서 어린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2: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2: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2: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저는 이 사건을 보면서 마치 우리 교회의 형편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크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 두 가지를 지적해 볼까 합니다.

 

첫째, 절대 잃어버리지 말아야할 것, 그 가치를 잃어버리고도 하룻길을 걸어갈 만큼 우리는 무지하다 것입니다.

예수님을 까맣게 잊고 살아가면서도 동행하는 줄로 착각하는 우리의 무지입니다.

보통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무지함이 오늘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없는 예수교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46절에 등장하는 사흘 후에라는 단어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자꾸 걸립니다.

하룻길을 간 후 예수를 잃어버린 줄 알고 찾아 나섰다면 다시 하룻길을 되돌아가면 됩니다.

굳이 사흘이라는 시간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2: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사흘 후에입니다.

하루 하고도 이틀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잃어버린 예수를 다시 찾는 일,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것을 강조하고 잇는 것입니다.

하루 하고도 이틀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하듯, 잃어버린 예수를 다시 찾는 일에는 우리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흘 후에가 담고 있는 의미입니다.

 

, 이제 우리 현실 속에서 뒤죽박죽이 된 것들을 다시 풀어봅시다.

여성들의 이름을 교회가 되찾아 준 것처럼, 오늘 교회가 잃어버린 예수님을 우리부터 우리 교회부터 찾아보지요.

우리 교회부터 잃어버린 것을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두 가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거짓 없는 믿음 곧 정직입니다.

하나님도 사람도 속일 수 없는 거짓 없는 믿음,

곧 정직한 신앙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다윗의 고백, 시편 5110-13절입니다.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정직한 영 곧 깨끗한 마음(새번역)입니다.

시사 전문 주간지 <시사저널>이 미디어리서치와 공동으로 통계청이 인정하는 33개에 직업군 중에 직업에 대한 신뢰도를 조사한 결과를 몇 년 전에 발표했습니다.

목사라는 직업의 신뢰도 몇 위일 것 같습니까?

참고로 1등은 소방관이 차지했고 꼴찌는 정치인(국회의원)이 차지했습니다.

목사의 신뢰도는 33개 직업 중에서 25(53.7%)에 그쳤습니다.

신부가 11위 승려가 18위 그리고 목사가 25위입니다.

종교인 중에 신뢰도가 꼴찌 입니다.

 

선교 초기 한국교회의 이미지는 이타적인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장 이기적인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벗어 던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직한 영 곧 깨끗한 마음을 우리가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 11계명이 있다는 소리 들어보셨습니까?

우리 한국교회에는 모세가 받은 십계명 외에 한 가지 계명이 더 있다고 합니다.

그 열한 번째 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절대 들키지 말라.’

무엇을 하든 절대 꼬리만 잡히지 말라 입니다.

부모를 멸시하든, 남의 것을 도둑질하든, 남의 아내를 탐내든, 거짓말을 하든, 어찌되었든 간에 절대 들키지 말라.’입니다.

위장전입이든 이중국적이든 부동산 투기든 세금을 내지 않든 절대 꼬리만 잡히지 말라. 이것이 한국교회 교인들이 십계명보다 더 잘 지키는 열한 번째 계명이라고 합니다. 씁씁하지요.

 

연세대 서정민 교수가 일본 동경대 도서관에서 찾은 일제강점기 경찰기록문서 중, 우리에게 자극을 주는 아주 흥미 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 소개합니다.

19193월 전국에 퍼진 대한독립만세사건이후 일본경찰들이 바싹 긴장을 하게 됩니다.

본국에 지시에 따라 만세시위주동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일본경찰은 비상근무를 하게 되엇습니다.

그 때 기록된 한 지방 경찰서의 수사일지 내용입니다.

 

서장인 다나가가 부하들에게 명령합니다.

지금당장 나가서 만세 시위주동자를 잡아와

명령을 받은 순사들이 급하게 뛰어나가는 데 그 중 한 순사가 뛰어 들어오더니 서장에게 질문을 하나 합니다.

서장님, 누가 만세 시위주동자인지 압니까?’

서장이 말합니다.

예수 믿느냐고 물어 보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 무조건 잡아와

당시 시위주동자는 거의 기독교 교인이었기 때문에 서장이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명령을 받은 순사가 다시 뛰어나가는 듯하더니 다시 돌아와 서장에게 또 묻습니다.

만약 예수쟁이들이 나는 예수쟁이가 아니라고 거짓말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 때 서장이 조인트를 까면서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빠가야로, 그들은 대체로 거짓말을 하지 못해, 그러니 당장 가서 예수 믿는 놈들을 다 잡아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대체로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이 정직함을 우리가 다시 찾아야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꼭 찾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직의 영 곧 성령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정한 뜻, 정직한 마음, 깨끗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쓴 시 중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내 마음 다 팔았고나! / 다 팔아먹었고나!

아버지가 집에서 나올 때 / 채곡채곡 넣어주시며

잃지 말고 닦아내어 / 님 보거든 드리라

일러주시던 그 마음 / 이 세상 길거리에서

다 팔아먹었고나!

        

그렇습니다.

하룻길도 안 되는 이 세상 길거리에서, 다 팔아먹은 그 마음,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그 마음을 보혜사 성령을 통해 다시 찾아야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194225세의 청년 시인 윤동주는 일제의 억압에 몸서리를 치면서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쉽게 쓰여 진 에 나오는 일부분입니다.

여러분 잃어버린 조국과 잃어버린 자유는 절대로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어둠을 조금 내몰 수 있는 등불 하나를 밝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예수, 절대로 그냥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한 손에 정직의 등불을 또 한손에는 성령의 등불을 든 자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