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과 성령세례
사도행전 19:1-7절 2015/1/18(주일)
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19: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19: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19: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19: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19: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해마다 연 말이 되면 은행마다 새 해를 맞이해서 홍보 차 달력을 발행합니다.
어느 은행 달력이 가장 인기가 좋은가요?
그렇습니다.
농협에서 발행하는 달력이 다른 은행에서 발행하는 달력에 비해 인기가 더 좋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기에는 농사와 관련된 음력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벽걸이 달력을 선호하시는 어르신들은 농협에서 발행하는 달력을 으뜸으로 칩니다. 농사일이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몸에 밴다.’
이 말이 참 무서운 것 같습니다.
일이 몸에 밴 분들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지요.
이제는 지긋지긋할 만도 한데 일을 놓지 않고 몸에 배어 살아가는 우리 부모님들을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합니다.
지금은 교회 절기 상 주현절입니다.
교회 절기, 좀 낯설지요.
주현절이란 말도 생소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교회의 절기를 설교 때 마다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일생이 기준이 되는 교회 절기가 우리 몸에 배기를 바라는 바람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강조하는 교회 절기가 우리 삶의 기준점이 되기를 바람 때문입니다.
주현절(主顯節, Epiphany)
그 뜻을 문자적으로 풀면 '주인 주'에 '나타날 현' 자입니다.
주인이 나타날 날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로 처음 사람들에게 나타난 날이지요.
한국교회는 이 날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만 세계 교회 전통에서 이 날은 매우 중요한 절기입니다.
특히 서방 그리스도교 교회는 주현절을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 예물을 바친 날로 기념합니다. 올 해는 소한이었던 1월 6일이 주현절입니다.
성탄 후 12일 째 되는 날을 주현절로 지키는데, 보통 1월 6일에 주현절에 해당합니다. (서방 그리스도교 교회: 예수님이 태어난 후 사람들에게 처음 나타난 날)
반면 동방 그리스도교 교회는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리심을 보았던 사건을 기념하는 날로 지킵니다.
(동방 그리스도교 교회: 예수님이 세례 받은 날)
그래서 세계 교회는 이 두 전통을 통합하여 주현절인 1월 6일은 서방 그리스도교 교회의 전통을 따라 동방박사의 방문을 기념하는 날로 지키고 있고, 주현절 첫째 주일인 지난 1월 11일은 동방 그리스도교 교회의 전통을 따라 예수님의 세례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였던 1월 11일은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이면서, 세계 모든 교회가 세례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이처럼 주현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공적으로 증언된 날입니다.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동방박사로부터, 그리고 마태복음 3장에 나오는 하늘로부터 오는 소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공적으로 온 누리에 증언된 날입니다.
마태복음 3장 16-17절입니다.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공적으로 입증되고 증언된 날이 바로 주현절이기 때문에 주현절은 매우 중요한 교회 절기입니다.
주현절.
여기서부터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특히 나사렛 사람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성자 하나님’이 될 수 있는지?를 증언해 줄 수 있는,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갖게 해 주는 날이 바로 주현절입니다.
그래서 주현절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교회 절기입니다.
주현 절기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인 2월 18일까지 계속됩니다.
주현절과 주현절 첫 번째 주일, 그리고 주현절기의 마지막 주일인 변화산주일의 강단색은 흰색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주현 후 둘째 주, 셋째 주, 넷째 주, 다섯째 주는 녹색(초록색입니다. 흰색은 영광과 기쁨을 상징하고, 녹색을 성장을 의미합니다.
녹색, 무엇을 상징한다고요?
성장입니다.
따라서 강단에 있는 녹색을 보면서 여러분이 묵상하고 다짐해야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신앙의 성장입니다.
더 나아가 교회의 부흥이지요.
주님의 공생애를 묵상하면서 주님과 함께 영적으로 성장해야 할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내용은 바울 사도의 제3차 전도여행 중에 일어난 한 일화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와 브루기아의 고원지대를 지나 마침내 에베소에 이르게 됩니다. 에베소, 지금의 터키 서남부에 있는 해안 도시입니다.
당시에는 소아시아라고 불리 우는 아시아주의 수도였습니다.
에게 해 인접한 항구도시답게 무역과 상업과 교통이 아주 발전했던 대도시입니다.
바울이 찾아 간 에베소는 한창 물 만난 도시였습니다.
에베소 역사상 최고의 부흥기에 바울이 찾아간 것입니다.
지금은 관광지가 되어서 일부의 터만 남아 있지만 도서관이나 신전 유적들, 그리고 거대한 원형 극장은 그곳이 얼마나 문화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발달한 곳이었는지를 지금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에베소는 아르테미스(다이애나, 달신) 여신 숭배로 당시 이름을 날리던 그런 도시였습니다.
에베소.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끌 부분에 고린도를 떠나 이곳에 잠시 들러 복음을 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그에게 찾아와서 좀 더 머물러 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이면 다시 돌아오겠다(행18:21)라는 약속만 남기고 에베소를 떠나 자신의 파송 교회인 안디옥으로 가게 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렸습니다.
그리고 3차 전도여행 때 자신의 약속대로 에베소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다시 찾은 에베소에서 몇몇 제자들을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여기서 바울이 만난 어떤 제자들, 과연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경건한 삶을 보고 높은 도덕성과 거룩한 삶을 추구했던 헬라인들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13:43, 50, 17:4절 에서는 이들을 이렇게 부릅니다.
13:43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13:43 회중이 흩어진 뒤에도, 유대 사람들과 경건한 (유대교)개종자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많이 따랐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에게 말을 걸면서, 늘 하나님의 은혜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하였다.
유대인들은 어느 곳에 있든 토라의 백성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지키며 살려고 애를 쓴 사람들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들의 행동이 낯설게 여겨 배척을 하기도 했지만 또 어떤 이들은 욕망에 따라 흥청망청 살아가는 삶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디아스포라 유대인처럼 높은 도덕성과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그들의 삶의 방식에 매료된 이들도 더러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들은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이었지만 유대인의 회당에 와서 율법을 배웠고, 친분을 쌓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에베소에 만난 '제자들'이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 아니라 유대교로 개종한 경건한 헬라인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대개 알렉산드리아 출신 학자인 아볼로를 통해 유대교에 입문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그들이 바울을 아주 반갑게 맞아준 것입니다.
바울이 혈통적으로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몇 날 가지 못해 아주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자신을 그 누구보다 기쁨으로 맞이해 주었던 그들이 진리 안에 바로 서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바로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율법 안에서는 바로 서 있었지만 성령 안에서 거듭나지 못한 그들의 그릇 된 삶을 바울이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망설임 없이 묻습니다.
19: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바울의 질문은 아주 단도직입적입니다.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많이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19: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세례’에 대한 비밀 하나를 그들에게 알려줍니다.
바로 성령세례입니다.
너희들이 아볼로부터 배운 요한의 세례가 지난날의 죄를 씻는 회개의 세례였다면,
이제는 참 사람이 되기 위한 참 세례가 있다는 것입니다.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성령세례입니다.
19: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19: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19: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주 예수의 이름으로 거듭나는, 새롭게 태어나는 성령세례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메타노니아’, 즉 잘못된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회개라면,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성령의 세례는 회개를 넘어 부활의 삶으로 나아가는 새 생명의 세례를 말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새 생명의 세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 되고자 원한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거듭나는 성령의 세례를 받아 새 생명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 그 자신이 물세례의 첫 증거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기 뒤에 오시는 분 곧 예수를 믿고 영접함으로 회개를 넘어 부활의 삶으로 나아가는 새 생명의 세례,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고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19: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19: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19: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말씀을 마칩니다.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순례할 때 마다 유서 깊은 교회를 찾게 됩니다.
웅장한 교회 건물을 보면, 그 웅장함에 모든 순례 객들의 시선이 멈추게 됩니다.
하지만 교회 건물만큼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교회의 안에 있는 성구입니다.
그 중에서도 세례반洗禮盤이 성구 중에 성구로 여깁니다.
그만큼 유럽의 교회가 세례를 중시했다는 말일 겁니다.
세례반洗禮盤
좀 낯선 용어이지만 세례를 베풀 때 사용하는 성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세례를 위해 성결케 하는 물을 항상 담아 놓는 그릇을 보관하는 곳이 세례반입니다. 주로 나무나 돌로 제작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대개 세례반의 형태가 8각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 성경에 나오는 상징적 숫자는 3, 4, 7, 12입니다.
3은 하늘의 완전을 뜻하고, 숫자 4는 지상의 완전을 뜻합니다.
그리고 3과 4의 결합수인 7과 12를 완전수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왜 8일까요?
그것은 세속의 시간을 지난 이후의 시간, 곧 부활의 시간을 상징합니다.
새 생명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세례반을 8각으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은 새 생명의 삶입니다.
교회 천장을 보시지요?
몇 각형입니까?
세례반을 뜻하는 8각형입니다.
우리교회 지붕은요?
역시 세례반을 뜻하는 8각형입니다.
이제 우리가 미루어 두었던 묵은 숙제를 해결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아 새 생명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전 보다 더욱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찬송가 302장 3절의 가사처럼 이제는 망설임을 떨쳐 버리고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가보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교회의 부흥의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마음 약하여 못가네/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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