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험한 기도
마태복음 6:9-13절 2015/2/1(주일)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 주님이 남겨주신 가장 고귀한 유산 중에 하나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 이 기도에는 우리 주님의 생명이 담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이 이 땅에서 흘린 땀과 피도 배어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주기도를 제대로 기도하고, 그 기도에 따라 사는 교회, 그리고 그 기도에 따라 책임 있게 살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기도를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싶게 암송해서 그런지 그 뜻을 깊이 묵상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애쓰며 자신의 몸을 부지런히 놀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보통 입술의 기도, 고백의 기도로 멈춥니다.
과연 주기도는 그런 기도일까요?
옛날부터 한국교회는 안수 받은 목사가 없을 때 축도 대신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 전통은 살아 있어서 목회자가 없는 모든 모임의 끝은 예외 없이 주기도문으로 마칩니다. 이런 전통 때문이지 주기도문이 마치 예배의 끝을 알리는 ‘알람음’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더욱 불편한 것은 그 기도문마저도 서로 일치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대게’라는 접속사 문제입니다.
대게, 꼭 붙여서 기도해야할까요 아니면 빼고 기도해도 무방할까요?
大蓋, 그리스어 접속사 ‘호티’를 번역한 말입니다.
접속사 ‘호티’ 사실 우리말로 번역하기 참 어렵고 부자연스러운 접속사입니다.
‘호티’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로 보통 ‘왜냐하면’이나 또는 ‘그 이유를 설명하면’ 정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의 경우 이것을 ‘For’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접속사 ‘호티’를 주기도문 속에서 ‘왜냐하면’이나 또는 ‘그 이유를 설명하면’으로 붙여 번역하면 사실 자연스럽지가 못합니다. 번역하는 것 보다는 번역하지 않는 것이 우리말 문맥에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를 우리말 성경은 번역해 놓지 않은 것입니다. 굳이 번역해 놓지 않아도 문맥과 그 뜻을 전달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점일획도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이 ‘호티’라는 단어를 꼭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찾아 낸 말이 우리 일상 속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大蓋’라는 아주 어려운 한자를 찾아내서 번역한 것입니다.
그 뜻을 풀이하면 ‘일의 큰 원칙으로 말하건대’입니다.
우리가 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바꾸면 ‘왜냐하면’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따라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대게’ 붙여서 기도해도 좋고 붙이지 않고 기도해도 좋습니다. 다만, 가능하다면 우리말 성경이 번역한 원안 그대로 기도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정리가 되셨습니까?
오늘 말씀에 제목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장 위험한 기도’입니다.
어떤 기도가 가장 위험한 기도일까요?
그렇습니다.
주기도문이 가장 위험한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는 예수님의 보혈로 구속된 우리의 몸이 이 땅에서 책임 있게 응답해야 할, 아니 우리 몸을 하나님에게 산 제물로 내어 맡기는, 책임의 기도라는 점에서 이 기도는 어쩌면 기도 중에 가장 위험한 기도일 것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늘 암송하고 있기 때문에 다 알고 있다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기도문의 기도 하나 하나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정말 함부로 기도할 내용의 기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찬송가 288장 3절의 가사처럼 ‘세상과 나는 간데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게 하는’ 아주 힘 있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소원을 아뢰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에 그래서 주기도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가장 위험한 기도입니다.
좀 더 들어가서 설명하면,
주기도문이 가장 위험한 기도인 첫 번째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아주 간결하지만 우리 입만이 아니라 우리 몸으로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할 책임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기도의 입말과 함께 기도의 몸말이 함께 필요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의 내용을 보면 기도문치고는 아주 간결하고 명확합니다.
지나치리만큼 간결합니다.
병행절인 누가복음 11장을 보면 더 간결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좀 더 깊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기도문, 사실 기도문 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짧습니다.
더욱이 우리 주님이 가르쳐 준 기도의 무게감으로 볼 때 지나칠 정도로 짧고 간결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모든 것들이 담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자로서 결단과 실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여섯 가지의 청원(petition)을 드리게 하십니다. 여섯 가지의 청원 중 처음 셋은 하나님에 관한 청원입니다.
1)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소서
2)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입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청원 기도 셋은 우리들에 관한 것들입니다.
4)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곧 필요한 양식을 주소서
5)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6)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
어떻습니까?
여섯 개의 청원으로 이루어진 주기도, 아주 간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요?
따지고 보면 그 하나하나의 기도가 만만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도는 이 땅에서 사는 우리의 소원이 아닌 하늘에 계신 우리 주님의 소원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기도이면서 가장 위험한 기도인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우리 주님이 기도문을 가르쳐 주기 전에 그릇된 기도, 잘못된 기도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십니다.
6: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여기에 보면 그릇된 기도의 형태 세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 자기상을 이미 받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기도
둘째, 누군가 내 기도를 들어 주었으면 하는 호소형 기도
그리고 셋째, 빈말만 계속해서 되풀이 하는 그래서 말만 많은 생떼 쓰는 기도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여기서 자유한지요?
사실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루과이에 있는 작은 성당 벽에 이런 주의 기도문이 풀어서 실려 있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말하지 말라.
늘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말하지 말라.
너 혼자만을 위해 생각하고 살아가면서 ...
‘아버지’ 라고 부르지 말라.
아들, 딸처럼 산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라고 기도하지 말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 늘 안간 힘을 쓰면서 ...
‘하나님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기도하지 말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라고 하지 말라.
항상 내 뜻대로 고집피우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고 하지 말라.
죽을 때까지 먹을 양식을 쌓아두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옵시고’라고 하지 말라.
누군가에게 아직도 앙갚음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라고 하지 말라.
늘 죄지을 기회를 찾고 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라고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내지 못하면서...
제발, ‘아멘’! 이라고 말하지 말라.
주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친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어떻습니까?
몸으로 드리는 주기도문이 왜 가장 위험한 기도인지 좀 느낌이 오시는지요?
헨리 나우웬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기도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리던 것을 포기해야 하고 편안하게 느끼던 것들을 떠나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주기도를 드리려면 우리는 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 기도는 옛사람을 죽이는 능력과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능력을 주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가장 위험한 기도이면서 또한 가장 위대한, 가장 능력 있는 기도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주기도문이 가장 위험한 기도인 이유는 나의 기도가 아닌 우리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연대성에 대한 책임입니다.
보통 기도하면 자신의 소원을 아뢰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자기 소원의 성취입니다.
물론 그것도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 맞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그 이상의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입니다.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기도가 가지고 있는 독특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기도의 초점이 하나님과 우리라는 ‘사이’에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우리와 하나님입니다.
물론 기도는 철저히 개인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기도자인 나 사이의 사귐의 통로로 주어진 것이 기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먹을 양식, 우리들이 지은 죄, 우리들이 받는 시험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왜 ‘우리’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 한 분이신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는 연대의식입니다.
너와 나가 없는 형제애입니다.
인종이 어떻든 국적이 어떻든 종교가 어떻든 성별이 어떻든 장애아든 정상인이든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라는 형재애, ‘우리’라는 연대의식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목적은 이런 것입니다.
믿음이 같은 사람과 연대하여 우리가 거룩한 몸을 주 안에서 이루었다면, 이제 남은 과제는 한 가지입니다.
우리 속에서 이탈한 이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들어오지 못하고 방황하는 우리의 형제 우리의 자매를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 주님은 ‘우리’라는 말을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먹을 양식, 우리들이 지은 죄, 우리들이 받는 시험
이것을 위해 함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은 누가복음 15장을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 비유의 제목을 다르게 붙입니다.
‘탕부의 비유’입니다.
‘탕부’ 무슨 뜻입니까?
사랑을 허비하시는, 사랑을 탕진하시는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재산을 탕진한 둘째 아들뿐만 아니라 그 상황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첫째 아들까지 품으시는 탕부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랑을 허비하시는 아버지, 탕부는 하늘 아버지 곧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자신이 가르치신 기도에서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일부러 ‘우리 아버지’를 강조한 것입니다.
사랑을 허비하시고 사랑을 탕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처럼 사랑을 허비하는 기도, 사랑을 탕진하는 기도를 드려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드리는 주기도문은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장 위대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은 주기도문을 이렇게 번역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한울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도 주와 같이 세상을 이기므로 아버지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옵시며 아버지 나라에 살 수 있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길고 멀게 이루시는 것과 같이 오늘 여기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먹이를 주옵시며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먹이도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먹이도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그 뜻은 풀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먹이’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먹이’
이처럼 하나님의 먹이가 되지 않으면 드릴 수 없는 기도가 주기도문입니다.
지금도 제가 주기도를 드릴 때 마다 늘 막히는 부분이 있습니다.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라는 말이 세 번씩이나 반복되는 이 기도의 부분이 제일 막힙니다.
왜 그럴까?
내 속에 아직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먹이’가 되려하지 않는 고집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진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핏대를 새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먹이감’이 되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점점 주님의 양을 먹는 먹사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주님이 가르쳐주신 주도기문을 놓을 수 없는, 그래서 지금도 기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위험한 이 주기도문이 저는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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