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잠언 16:1-9절 2015/3/1(주일)
16: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16: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16:5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16:6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16:7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16:8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가수 최희준씨가 부른 하숙생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기억하시는지요?
1965년에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으로 발표된 곡인 데도 여전히 그 생명력을 잃지 않는 것을 보면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와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왠지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은 느낌이 확 들지 않습니까?
특히 2절에 나오는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라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묘한 느낌도 받게 됩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제 스스로에게 물어 봅니다.
"내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이 길에서 해야 할 일은 또 무엇일가?“
사실, 대답하기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이런 답 아닌 답을 내립니다.
"하루하루 즐겁게 기쁘게, 그리고 성실하게 주어진 자리에서 살아내자“
제가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하나님의 사람, 지금 보다 더 나은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 외에는 별다른 꿈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 있어 저는 바울 사도가 부럽습니다.
제가 사도 바울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그가 자기 인생의 목표를 분명히 알고 있고, 또 그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장 12-14절(새번역)3:12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3:13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3: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바울의 인생 목적은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3:14 위로부터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것.
이것이 바울이 정한 인생의 목적입니다.
다시 말해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받게 될 영광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을 얻는 것.
이것이 바울이 꿈꾸는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었습니다.
주기도문의 마지막 끝 부분으로 표현하자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적 선언으로 표현하자면, 의의 최후 승리와 영생을 얻는 삶입니다.
반면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상상했던 그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요?
내가 그 옛날 바라고 꿈꾸었던 그대로 살아가시는지요?
글쎄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오히려 뒤에 있는 것에 자꾸 사로 잡혀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하면서도, 새 생명을 얻고 거듭났다고 하면서도,
참 이상하지요.
자꾸 뒤에 있는 것을 묵상합니다.
불행했던 과거, 결코 잊지 못하는 상처, 그리고 무능한 나의 삶, 이런 현실의 장벽에 갇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앞에 있는 것 곧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 나라로 내 몸을 내 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목적하고 바라는 인생과 현실 속에서 주어진 인생은 언제나 그렇듯 불화 속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런 불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의 말씀입니다.
16:1 마음의 경영(생각, 계획)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결정)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믿어지십니까?
이것을 새 번역으로 다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6:1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
일의 결정, 인생의 결정, 누가 하신다구요?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하십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
한편으로는 옳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솔직히 쓸쓸해집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애를 써 보고 노력을 해 봐도 내 삶이 내 의지대로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로 자칫 오해해서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 말의 뜻이 그런 것일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일의 결정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 맡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계획하는 것은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일의 계획도 일의 목적도 세우지 못하는 멍텅구리 인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일의 결정은 주님의 몫이고, 일의 계획은 우리의 몫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일의 계획, 일의 목적을 우리가 세워야 합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인생의 계획,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라는 말의 담긴 속뜻입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런 것입니다.
계획을 우리가 세운다 할지라도 그 계획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역사를 무시하지 말고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일을 일 되게 하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2절이 가리키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16: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우리의 마음, 우리의 심령, 심지어 우리의 운명까지도 감찰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주권 속에 우리를 의탁하며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사람 참 이상하지요.
이 땅에 속한 운명에 매여 살아갑니다.
자기 인생의 결정이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라 이 땅의 운명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이런 분들이 꽤 있습니다.
우리가 몸 닫고 있는 동아시아권에서는 사주팔자가 우리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주 곧 태어난 년 태어난 달 태어난 날 그리고 태어난 시간, 여기에 기록된 8글자로 인생의 정해진 운명을 점칩니다.
이는 서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어진 운명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좋은 예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이름들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운명의 여신들의 이름은 모이라moira, 아난케ananke, 그리고 티케tyche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이렇습니다.
모이라(몫) 아난케(필연), 티케(우연)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몫 곧 필연과 우연이라는 날실과 씨실로 연결된 운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 사주팔자에 정해진 운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운명적인 요소, 분명 있습니다.
제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았던 운명적인 만남, 운명적인 사건, 운명적인 장소,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 주권,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하나님으로부터 택정함을 입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성경에는 유난히 '택하심을 받았다'는 구절이 자주 나옵니다.
부르심을 받은 순간 그것이 우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일의 결국에 가서는 그것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주권하심,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하심,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주권하심, 하나님의 역사하심
하지만 세상에는 우리가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납니다.
사람의 일과 그 결정을 하나님이 주권하시고,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하지만은 정말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 줄 모릅니다.
오늘이 삼일절입니다.
독립 운동가의 후손들 지금 어떤 삶을 살아갑니까?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살아갑니다.
어떤 이는 아직도 자신의 조국을 조국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이방인의 땅에서 그 뼈를 묻기만 기다리고 살아갑니다.
반면, 친일파의 후손들은 어떻습니까?
호의호식 하며 잘 살아갑니다.
지금도 그의 후손들은 이 땅에서 최고의 권력자로 또 최고의 권세가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욕심의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현실들을 보면 시편의 시인처럼 하나님에게 따져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이 땅의 정의, 이 땅의 공의는 어디 있습니까?
계획은 사람이 세우고, 그 결정은 하나님이 하신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왜 우리 삶 속에서 늘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까?
시편의 시인은 이런 불합리한 현실을 고발하기도 하고 항변하기도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시가 73편입니다.
73:1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
73:2 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구나.
73:3 그것은,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73:4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 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 흐른다.
73:5 사람들이 흔히들 당하는 그런 고통이 그들에게는 없으며, 사람들이 으레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다.
73:6 오만은 그들의 목걸이요, 폭력은 그들의 나들이옷이다.
73:7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서, 거만하게 눈을 치켜뜨고 다니며, 마음에는 헛된 상상이 가득하며,
73:8 언제나 남을 비웃으며, 악의에 찬 말을 쏘아붙이고, 거만한 모습으로 폭언하기를 즐긴다.
73:9 입으로는 하늘을 비방하고, 혀로는 땅을 휩쓸고 다닌다.
73:10 하나님의 백성마저도 그들에게 홀려서, 물을 들이키듯,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73:11 덩달아 말한다. "하나님인들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가장 높으신 분이라고 무엇이든 다 알 수가 있으랴?" 하고 말한다.
73:12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구나.
73:13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과연 미련 맞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살아 온 우리의 깨끗한 마음과 우리의 깨끗한 삶이 허사인 것일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잠언의 지혜 자는 이런 위로의 말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16:5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이 땅의 모든 것이 그 쓰임에 따라 적당한 때가 있는 것처럼 의인이 처한 고난 그리고 그 반대로 악인이 누리고 있고 있는 번영.
그 종지부를 짓는 하나님의 시간이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악인은 심판받고 의인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시간, 그 시간이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운명이 아니라 우리를 능히 심판하시기도 하시고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그 주권 아래 너의 인생과 너희 인생의 계획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운명에 기대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니 악인이 득세하는 현실로 인해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처럼 남들보다 운이 좋아, 좋은 운명을 가지고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서 불의 한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잠언 기자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삶의 비결입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말씀을 마칩니다.
하루는 테레사 수녀가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몽당연필 한 자루.
그 한 자루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 몽당연필 한 자루가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면, 하나님의 주권 아래 붙들려지면, 말이 달라집니다. 결과가 다릅니다.
여러분 소원하십시오.
하나님 손에, 하나님의 주권 아래 놓인 한 자루의 몽당연필이 되게 해 달라고,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무수한 기적, 무순한 사랑의 흔적들이 우리를 통해 이 땅에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가 미처 꿈꾸지 못했던 큰일까지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을 경영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 여러분의 경영을 맡기십시오. 그러면 살 길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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