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다는 것
야고보서 2:1-4, 14-17 2015/ 5/ 10(주일)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2: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2: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오늘 우리가 읽은 편지는 야고보서입니다.
야고보가 쓴 편지라고 해서 제목을 우리가 야고보서라고 부릅니다.
야고보, 예수님의 친동생이지요.
물론 천주교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야고보를 예수님의 친동생이 아니라 사촌동생이라고 주장합니다.
천주교회에 있어서 마리아는 성모입니다.
성부 하나님처럼 거룩한 분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동정녀(처녀)입니다.
하나님처럼 성결 된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친모인 마리아가 예수 외에 다른 자녀를 낳지 않았다고 그들은 믿고 또 그렇게 가르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 처녀로 살았다는 아무런 증거가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주교회의 주장과 달리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를 예수님의 친동생으로 봅니다.
야고보.
야고보의 큰 형 예수가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자, 그를 믿고 따르던 무리들이 엄청난 혼돈(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고는 하지만 그래서 몇몇 사람들에게 친히 부활의 몸을 증거 했다고는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 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 상당수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런 혼란한 예루살렘 교회를 수습하고 초대교회의 새로운 지도자로 새워진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친 동생 야고보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예수님의 수제자 그룹인 즉 베드로와 야고보(여기서 말한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가 아니라 요한의 형제 야고보입니다.)와 요한이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제자들 중 가장 먼저 순교를 당하고 그리고 사도행전의 기록처럼 베드로와 요한은 복음 선교를 위해 이스라엘을 벗어나 여러 도시들로 선교 여행을 떠났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중심으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야고보를 가리켜 '예루살렘 교회 초대 감독'(the first bishop of Jerusalem)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야고보서는 초대감독이 보낸 첫 번째 목회 서신인 셈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 야고보서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대사회 속에서 나사렛 사람 예수를 선지자가 예언한 그리스도로 그리고 율법이 증거 한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포기를 의미했습니다. 기득권의 포기는 물론이고 모든 것들로부터 포기를 의미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이라는 혈통의 울타리마저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예수님의 젖동생 야고보는 62년경에 유대인 자치 의회인 산헤드린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투석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만일 야고보가 자신의 형을 그리스도로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다면 투석형이라는 끔직하고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형 예수에 대한 믿음 곧 그리스도에 대한, 구세주에 대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이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교회 초대 감독'(the first bishop of Jerusalem)이었던 야고보의 인생 마침표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남긴 편지 야고보서를 보면 그 어떤 속임수도 그 어떤 자기 자랑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고 그를 따르는 믿음에 대한 담백한 진실만을 담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여러 편지 중에서 야고보서를 제가 더욱 신뢰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야고보는 오늘 우리에게 이런 권면을 납깁니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특히,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왜 그랬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사실, 초대 교회 신자들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자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 많지도 않았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가난한 자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부자라고해서 대놓고 특별 대우한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부자를 대하는 태도에는 분명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딱 꼬집어 말 할 수는 없지만 분명 차별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교회 초대 감독'(the first bishop of Jerusalem)이었던 야고보
눈에 들어 온 것입니다.
서울 인사동에 가면 좁은 골목길에서 고풍스러운 예배당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승동교회’입니다. 삼일운동 때는 젊은 학생들이 독립만세 운동을 처음으로 모이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1893년 북장로교 선교사인 무어(한국이름 모삼열)에 의해서 세워진 장로교회입니다.
승동교회,
원래 이름은 곤당골 교회입니다.
곤당골 교회, 이 교회는 아주 독특한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백정교회입니다.
반상의 구별이 뚜렷했던 조선시대 백정들이 다니는 교회라고 해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19세기 말이 되어도 조선의 백정은 어른의 상징을 상투를 틀지 못했습니다.
하는 일이 하도 천하다고 해서 어른이 되어도 백정은 상투를 틀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천한 백정이 곤당골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주인공이 바로 백정 출신의 장로 박성춘입니다.
백정 박성춘이 교회에 나가게 되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당시 곤당골 교회는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서 치유를 받은 양반들이 다니기로 유명한 교회였습니다. 특히 고종의 주치의였던 에비슨의 치료와 전도로 상당수의 정부 관료와 양반들이 출석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에 백정 박성춘이 등록하더니 자신들처럼 세례까지 받은 것입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자 양반들이 담임목사인 모삼열(선교사 무어)을 찾아갑니다.
백정 박성춘과 함께 한 자리에서 예배드릴 수 없으니 백정 박성춘을 교회에 나오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양반들이 교회 출석을 거부하고 예배를 거부하게 됩니다.
선교사 무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양반을 달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사람을 차별하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한 곳이니 다시 돌아오라고 설득하고 또 설득했지만 결국 자신의 뜻을 돌이키지 않은 양반들이 나가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세워진 교회가 홍문수골교회니다.
물론 3년 후 다시 두 교회가 승동교회로 다시 합쳐지기는 했지만 이것이 사람을 차별하는 당시 교회의 풍토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초대교회도 그렇고 우리나라 초대교회도 그렇습니다.
차별,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당연하게 있는 일이 차별입니다.
차별과 또 다른 차별의 형태인 역차별
이런 일이 없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지역 단체장의 주장처럼 보편복지가 아니라 복지차별이 옳다고 여기는 분들이 많은 것을 보면 이것은 어쩌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세요.
예수님의 젖동생 야고보가 말합니다.
다시 2장 1절입니다.
이번에는 제가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2: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차별,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밖에는 몰라도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무심코 용납했던 차별.
그 차별은 영광의 주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결코 어울릴 수 없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즉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New Living Bible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 놓았습니다.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하여 대한다면 어떻게 여러분이 우리의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믿음입니다.
믿음, 과연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을 이것으로 보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좀 솔직해 봅시다.
정말 우리가 우리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 자유 한지요?
깊이 한 번 반성해 보자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의 행보를 보십시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그분은 가난한 사람에게 먼저 가셨습니다.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 있으면, 그분은 병든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경건하게 사는 사람과 죄악 가운데 사는 사람 중에서 죄인을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분을 그리스도로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 행보, 우리 그리스도교의 발걸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낮은 곳입니까 높은 곳입니까?
약한 자입니까 강한 자입니까?
이 점에서 대해서 이제는 우리가 철저하게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하면서도 더 가난한 자를 차별했습니다.
우리가 연약하면서도 더 연약한 자를 차별했습니다.
우리가 못났으면서도 더 못난 자를 차별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천둥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또 하나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차별을 넘어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15-17절입니다.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여러분 안에 정말 그리스도 예수의 믿음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 믿음을 하나님을 향한 그 믿음을 책임 있는 행실로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AccountAbility, 가난하고 연약하고 애통하는 이웃에 대한 책임입니다.
새번역성경으로 다시 읽습니다.
2: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2:16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2:17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5월 둘째 주일입니다.
그 어느 달보다 가정의 따스함을 느끼는 달입니다.
따스한 가정, 그리고 정말 좋은 우리 교회
저에게는 하나님의 축복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받은 복만 헤아리다가 낭비하며 살아가는 그런 못난 인생을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소망합니다.
우리가 믿는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 분이 만난 가난한 사람, 그 분이 만난 병든 사람, 그 분이 만난 억압받는 사람들을 우리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말로만 그들에게 ‘샬롬’ 평안을 비는 인생이 아니라 우리 주님처럼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의 주린 배를 채우고,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는 능력 그 사랑의 능력이 충만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면 사람 대하는 것이 달라지고, 돈 쓰는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고약한 말버릇도 달라질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 삶의 모든 면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셨습니까?
좋은 부모, 좋은 자녀를 두셨습니까?
좋은 아내 좋은 남편을 만나셨습니까?
좋은 교회, 좋은 목사를 만나셨습니까?
그러면 그 축복을 여러분 안에만 고이게 하지 마시고 흘려보내십시오.
여러분의 물질이 필요한 곳에 여러분의 물질을
여러분의 위로가 필요한 곳에 여러분의 위로는
그리고 여러분의 사랑이 필요한 곳에 여러분의 사랑을
흘려보내시고 또 흘려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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