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신비
시편 119:25-32절 2015/ 3/ 15(주일)
119:25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119:26 내가 나의 행위를 아뢰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사오니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119:27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119:28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119:29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119:30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들을 내 앞에 두었나이다
119:31 내가 주의 증거들에 매달렸사오니 여호와여 내가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하소서
119:32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그리스도교만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절기 일곱 개가 있습니다.
예수님 생애를 기준으로 순서대로 정리해 봅시다.
강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⑤부활절 ⑥성령 강림절 ⑦마지막 성령강림절인 왕국절, 이렇게 일곱 절기입니다.
이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다룬 절기가 사순절입니다.
영어로는 ‘렌트(Lent’)라고 합니다.
‘렌트’, 사순절은 그리스도교가 처음 생겼던 초대교회 때부터 지킨 절기가 아닙니다. 기록에 따르면 약 4세기 때부터 교회의 절기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사순절, 사실 성경에는 사순절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에 금식이나 금욕 생활을 하라는 어떠한 명령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활절 이전 주일을 빼고 사십일을 구별되게 지키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이롭게 하는 시간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절기라 할 때의 '절'은 '마디 節'자를 씁니다.
이 '마디 節'이라는 글자에는 대나무 竹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고 재미있습니다.
몸통에 비해 아주 높게 자랍니다.
그 속이 텅 비어있는데도 높이 자랍니다.
놀라운 것은 거센 바람에 넘어질듯 하면서도 넘어지지 않는 생명력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대나무만이 가지고 있는 ‘마디’의 특성 때문입니다.
제가 교회의 절기를 늘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대나무가 가지고 있는 마디의 힘처럼 우리의 신앙이 자라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일을 매듭짓는 마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매듭짓는 마디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고, 신앙의 성숙을 도모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절기를 언급하고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오늘은 사순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받아야할 은혜, 받아야할 구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이것을 고민, 고민하다가 찾아낸 주제가 고난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셨던 고난.
그 고난 속에 감추어진 역설의 신비, 그 고난의 비밀을 좀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19:25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다.’
‘내 영혼이 땅에 붙었다.’
무슨 말입니까?
새 번역 성경을 보면 그 의미를 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 내 영혼이 진토 속에서 뒹구니’
인생의 밑바닥에서 처절하게 뒹굴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 해보셨습니까?
인생의 밑바닥, 그 밑바닥에서 처절하게 뒹굴어 보셨습니까?
남이 남긴 밥에 물 말아 드신 적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시인은 말합니다.
자고로 인간이라면 마음이 찢어지는 이런 경험 하나 쯤은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자녀들이 이런 인생의 밑바닥을 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부모 된 우리가 그런 기회를 좀 막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사람다운 진짜 사람이 됩니다.
왜냐?
그런 사람만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처럼, 야곱처럼, 요셉처럼 밑바닥에서 뒹굴어 보아야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탁하나 드리겠습니다.
막지 마세요.
고난의 길을 막는 그 순간 여러분의 자녀는 죽는 것입니다.
이 점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고난.
그 역설의 고난은 신비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분은 동의할 것이고 또 어떤 분은 절대로 동의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고난 그 자체는 결코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고난을 포장하고 미화한다고 해도 고난은 아픔입니다.
상처이고 분노입니다.
멀쩡한 인간이라면 피하고 싶은 것이 고난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의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면, 이것을 우리가 정말 믿는다면, 우리가 지금 당하는 고난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는 자를 밑바닥에 내 치는 이야기가 성경에 너무나도 많이 기록된 것을 볼 때, 고난이 주는 그 어떤 유익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한 번 열어 놓고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119편을 기록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그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 중에 처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하나님, 내 영혼이 지금 흙바닥에서 뒹굽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마음의 고통이 가득한 고난을 주시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오늘 저는 한 가지 이유만을 소개할까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역설적이지만 고난 속에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지 않고 서는 결코 인간은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자식이 속 쌔길 때 꼭 하는 말이 있는 있습니다.
‘너 같은 자식 하나 나서 한 번 키워봐’
그래야 부모마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을 통해 자기 속이 썩어 봐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그 분의 깊은 뜻을 비로써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6-27절입니다.
119:26 내가 나의 행위를 아뢰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사오니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119:27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27절에서 말하는 ‘주의 기이한 일’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밑바닥에서 경험하게 되는 신기하고 희한 한 일을 말합니다.
분명 고통스러운 날입니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그런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일,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배우고 깨닫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제가 늘 마음으로 흠모하는 분이 계십니다.
지금도 그 분의 글을 제 성경책에 적어놓고 다닐 정도로 그분의 마음이 저는 참 좋습니다.
제가 처음 목회했던 경기도 시흥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던 고 제정구 선생님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그분인데 그분이 쓴 글 중에 『가짐 없는 큰 자유』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난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이라는 장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5장 산상복음의 말씀처럼 늘 가난하게 살고 싶은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했습니다.
참 별난 꿈이지요.
부자가 되는 것이 꿈이 아니라, 가난하게 사는 것이 꿈입니다.
실제로 그 분은 그분의 꿈대로 늘 가난해지기 위해 자기의 욕망과 부단히 싸운 삶을 살았고 그리고 행복해 했던 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행복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아내가 첫 아이를 임신을 한 것입니다.
자기야 수제비나 라면으로 한두 끼씩만 먹고도 버틸 수 있었지만, 배가 불러오는 아내가 굶주림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있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머지않아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자 그는 가난이 처음으로 무서워지기 시작했고, 아무래도 이제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여기저기에 이력서를 내게 됩니다.
이분이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입니다.
최고의 엘리트이지요.
누가 이런 인재를 마다하겠습니까?
그런데 번번이 안 되는 것입니다.
될 듯 될듯하다가 끝에 가서는 결국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매형이 이런 연락을 해왔다고 합니다.
"중앙정보부(국정원)에서 연락이 왔는데, 취직이 어려울 거래. 그 쪽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들어주면 즉각 취직도 시켜주고 살림집도 마련해주겠다는데…"
그러면서 매형이 말끝을 흐리더라는 것입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내건 조건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청계천 판자촌에서 빈민들과 함께 살지 않는 것, 그리고 둘째, 정일우 신부님(당시 빈민 운동을 하던 아일랜드 신부인데 복음자리 딸기잼을 만드신 분입니다. 2014년6월 2일 선종, 아시아의 노벨상 막사이사이상을 고 제정구 의원과 공동수상)과 함께 하지 말 것. 이 두 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는 자기가 가야 할 길이 훨씬 분명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나의 길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곧 중앙정보부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판자촌에 살라는 것이고 또한 정일우 신부님과 함께 살라는 것이구나!'
그리고 자기 호주머니를 뒤적입니다.
전 재산 3000원이 손에 잡혔습니다.
그것으로 책장에 가서 성경 한 권을 구입 한 후 성경 맨 앞에 이렇게 적습니다.
'축 취직 기념(하느님께). 1976년 9월 1일'
세상의 직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장에 취직했다는 말입니다.
이 날 이후 단 하루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지도 않았고, 먹을 것 입을 것을 단 한 번도 걱정해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29절부터 봅니다.
119:29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119:30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들을 내 앞에 두었나이다
119:31 내가 주의 증거들에 매달렸사오니 여호와여 내가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하소서
119:32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이것이 고난의 신비이고 이것이 고난이 주는 유익입니다.
거짓 행위로부터 떠나게 하는 고난을 통해 넓혀진 마음. 성실한 마음.
그 마음으로 주의 계명들의 길로 내 몸을 내밀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 가는 신앙인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당하는 고난.
분명 우리 인생의 많은 아픔과 상처를 남길 것입니다.
그래서 두렵고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시인을 말합니다.
고난, 분명 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하지만 그 고난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 그 깊은 뜻을 비로써 헤아릴 수 있는 길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박한 내 심령이 정화될 뿐만 아니라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내 마음이 하나님 마음처럼 넓혀지더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요즈음 저에게 가장 힘이 되는 말씀이 있다면 갈라디아서 6장의 말씀입니다.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
비록 예수님 때문에 당한 상처, 스티그마 이지만 그것이 절대로 부끄럽지 않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나에게는 자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의 신비를 알았던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욕심 때문에 당한 상처가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생긴 그 상처가 얼마나 있습니까?
물론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상처라고 해서 안 아픈 것이 아닙니다.
상처는 다 아프고 감추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가 그냥 상처로 끝나지 않는 것은 첫째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강박한 내 심령을 정화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넓어지기 은혜를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바리기는 이 사순절을 통해 고난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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