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멘으로 살아내다
고린도후서1:15-22 2015/1/25(주일)
1:15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16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1:17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1: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1: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1: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독일 루터교회 목사였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1928년 12월 11일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예수)는 대다수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추방된 상태이다.
종교(신앙)는 주일 오전으로 추방되었고, 우리는 몇 시간 동안 그리로 물러나 있다가 곧바로 자기의 일터로 돌아갈 뿐이다.’
어떻습니까?
혹 우리가 이런 삶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일 겨우 몇 시간만 주님에게 집중하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주님을 추방하고 ‘그럭저럭’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주님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너무 쉽게, 너무 익숙하게 걸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고린도 교회가 그랬습니다.
고린도교회처럼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 바울 사도의 애를 태운 교회도 드뭅니다.
그리스남부 해안에 위치한 도시 고린도.
이 지역에 속한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의 2차전도 여행 중 주후 50년경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교회 역사상 비교적 꽤 이른 시기에 세워진 초대 교회 중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해서 약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곧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비밀을 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증거가 될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입니다.
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하나님의 증거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의 증거로서의 십자가 복음.
오직 이것 만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증거 위에 세워진 교회가 고린도 교회입니다.
그러니 그 어느 교회들보다도 생기가 넘쳤고, 성령이 충만한 교회로 성장하게 됩니다.
고린도교회, 이 분들 빼고 이야기 할 수 없지요? 누구입니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입니다.
아주 실실한 그리스도인들이요.
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 기근으로 위기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헌금을 모아 전달할 만큼 꽤 반듯하고 건강한 교인들로 구성된 교회가 고린도교회입니다.
교인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이 증거하고 있듯이 각자 받은 은사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떠난 후 고린도 교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위기를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증거가 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의 증거가 되었던 십자가의 복음, 그 원색적인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복음의 목소리가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가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 내 이런 저런 파벌이 생간 것입니다.
그러자 아주 처참할 정도로 교회가 망가집니다.
신앙의 철저함은 점차로 사라졌고, 옛 삶의 습성이 하나 둘씩 슬며시 그들의 삶을 사로잡게 되면서 교회는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신앙이라는 중심이 무너지자 이 전에 없었던 가시 돋친 말과 행동으로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는 일들이 잦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아주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교인들 간의 갈등은 교회를 넘어 법정 다툼으로 비화되었으며, 성적인 타락도 급격하게 일어났습니다. 관용과 이해 그리고 사랑의 기쁨 대신, 차별과 우월감 그리고 불신과 원망이 그들의 삶을 지배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델이 되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의 추문거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복음 전도자인 바울에 대한 비방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가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가 시끄러워지자 그 모든 책임을 바울에게 돌린 것입니다.
‘사도의 자격이 없다든지,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든지. 변덕스럽다든지, 겉으로는 경건한 척 하지만 사실은 제 잇속이나 차리는 속물이라든지, 언변이 시원찮다든지, 보수를 받지 않겠다고 뻗대더니 빌립보 교인들에게 도움을 받아 자기들 체면을 구기게 했다든지….’ 등등등
제멋대로 판단하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버릇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이 소식을 접한 사도 바울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영혼의 그릇이 큰 사람이라 해도 이런 모함은 상처가 되게 마련입니다.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찾아가 자신에 대한 모든 오해를 풀까도 생각했지만 조금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을 내립니다.
그래서 우선 편지 한 통으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서 보냅니다.
그렇게 해서 쓰여 진 편지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 고린도 전서입니다. 사실 편지라고 보기에는 좀 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6장에 이를 정도로 장문의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에 분량은 꽤 길지만 사실 내용은 간단합니다.
첫째, 너희들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증거 이신 우리 주님의 몸으로 다시 거듭나라는 것입니다.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하나님의 성전답게 너희 안에 있는 거룩함.
곧 하나님의 품성을 잃지 말고, 주님의 몸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부탁하는 것은 유아기적인 신앙의 면모를 벗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고 또 성장하라는 것입니다.
누구처럼 말입니까?
나, 바울처럼 성장하라는 것입니다.
10: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처럼 그가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남긴 핵심적인 내용은 대략 이 두 가지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첫 번째 편지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의 기대처럼 그리고 사도 바울의 마음처럼 고린도 교회가 변화되지 않고 오히려 사도 바울을 더 불신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환장할 노릇이지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낸 편지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 불씨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편지 말미에 기록한 사도 바울의 약속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첫 번째 편지 말미에서 이런 약속을 하나 합니다.
16: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16: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바울이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러자 바울의 적대자들은 고린도 방문을 미룬 바울에게 ‘신의가 없는, 그리고 변덕스러운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여버립니다.
‘신의가 없는 변덕스러운 사람’
본의 아니게 참 난감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제는 침묵만이 능사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적극적으로 자기 해명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쓰여 진 편지가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 고린도 후서입니다. 바울은 두 번째 편지를 쓰면서 급하게 자기 자신의 상황을 변호합니다.
오늘의 본문 1장 15절부터 보겠습니다.
1:15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16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1:17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1: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선 마케도니아에 들렀다가 고린도 교회가 모아 놓은 구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려던 계획을 잠시 유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기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마당에 돈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이 적절치 않아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두고 맹세하듯 자기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이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다시 1장 17-18절을 새 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립니다.
1:17 내가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이 변덕스러운 일이었겠습니까? 또는, 내가 육신의 생각으로 계획을 세우기를, '아니오, 아니오' 하려는 속셈이면서도, '예, 예' 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겠습니까?
1:18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예' 하면서 동시에 '아니오'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갈1:10)
또한 로마서에서는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롬14:8)라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이런 그의 삶을 보건대 ‘'예' 하면서 동시에 '아니오' 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그의 해명은 한 점 과장도 없는 진실입니다.
바울이 지금, 이렇게 구차한 자기 해명을 하는 것은 오해받는 것이 억울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왜곡될까 하는 두려움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고린도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고전11:1)라고 권고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삶은 사도답게 그리스도라는 중심과 늘 연결된 삶이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
이것이 바울 사도의 열망이었고 삶이었고 기준점이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려는 열망, 그래서 ‘예’ 와 ‘아니오’ 가 함께 공존할 수 없는, 항상 아멘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바로 바울 사도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사도로서 아멘으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1장 19절 새번역입니다.
1:19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여러분에게 선포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도 되셨다가 동시에 '아니오'도 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예'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유일한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예' 만 있을 삶입니다.
아멘이지요.
말씀을 마칩니다.
저는 이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삶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멘’이라는 말을 우리는 그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으로 새깁니다.
맞습니다.
바른 해석입니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한 가지 진실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신뢰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신뢰, 이 믿음이 없으면 ‘아멘’ 할 수도 없고, 아멘으로 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아멘을 의도적으로 유도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아멘은 믿음이지, 목사의 권위에 눌려 나오는 여흥구가 아닙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가 진심으로 ‘아멘’ 하는 순간 우리의 정신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행실은 주님 안에서 굳건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 안에서 ‘아니오’ 가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입술로는 ‘아멘’ 인데, 행동으로는 ‘아니오’ 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말입니다.
“믿는 사람만이 순종할 수 있고, 순종하는 사람만이 믿을 수 있다”
우리는 신앙이 먼저고 순종은 그 다음이라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오직 순종의 행위 안에서만 자신의 참됨을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멘의 순종은 아주 구체적인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좀 더 쉬운 예를 들자면 우리 주님 말씀처럼 강도 만난 이웃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벗이 되어주고, 고통을 덜어주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멘으로 살 때 우리는 비로소 믿음의 사람,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보십시오.
‘아멘으로 살아 내다.’
왜 제가 ‘아멘으로 살다’ 하지 않고 ‘아멘으로 살아 내다’로 표현 한 줄 아십니까?
진정한 아멘은, 진정한 순종은, 진정한 믿음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우리의 용기만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구의 도움, 누구로부터 은혜를 받아야할까요?
그렇습니다.
성령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분을 ‘보혜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멘의 삶, 순종의 삶, 믿음의 삶
분명 버겁습니다.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꽤 큰 짐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함께하시면, 성령이 도와주시면 그 짐은 쉽고 가볍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입술만 앞서는 ‘아니오’의 삶을 버리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 안에서 예의 삶을 성령님과 함께 살아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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