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마태복음 7:7-14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心貧者 2018. 12. 19. 14:29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복음 7:7-14절                                                                                                           2015/6/14(주일)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7: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7: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낙심한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즐겨 인용하는 말씀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그러고 보면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특히 좋아 하는 성경 구절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가장 많은 분들이 기억하는 성경구절은 이것입니다.

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그 다음으로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 마가복음 923절입니다.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하나 더 찾아보겠습니다.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특히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나 '긍정의 힘'을 강조하는 분들은 이 본문들을 아주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런 구절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인용하기 위해서는 문단의 맥락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신앙이 왜곡되지 않고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다시 마태복음 77절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자세히 본문을 살피시면 좀 이상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는데 무엇입니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명령어만 있지 어떤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한인

목적어가 빠져 있습니다.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찾고, 무엇을 두드려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그리고 두드리라고 말씀하고는 있지만 정작 그 목적어가 빠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엉뚱한 것들을 그 속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자신의 출세라든가 자신의 성공이라든가 세속적인 것들을 집어넣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양 개인의 소원을 쓱 집어넣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렇게 읽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뜻과 전혀 다른 왜곡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567장에 기록된 산상설교의 맥락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산상설교를 통하여 우리 주님이 가르치고자 하신 말씀의 핵심은 이런 것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토라)은 회당(시나고그)에서 서기관이라고도 부르는 율법학자들과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회당이 아닌 산상, 산 위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 즉 율법의 의에 대한 가르침과 대조되는 말씀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5:21 옛 사람에게(여기서 말한 옛 사람이란 회당에서 가르치는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처럼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이 산상설교의 맥락 안에서 흐르는 핵심 내용입니다.

특히 예수님이 말씀하신 최고의 삶의 원리는 이것입니다.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 말씀 속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최고의 삶의 원리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어 나오는 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추구하는 사람은 함부로 남을 비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라는 가치를 두고 있지 않으니까, 남을 함부로 비판하는 것이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라는 가치를 두고 있다면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구하라', '찾으라', 그리고 '문을 두드려라'는 명령의 목적어 역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하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원어는 '아이테인aitein'입니다.

'질문하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반면 '찾으라'는 단어는 제테인zetein’인데 '탐구하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구하고 찾는다는 것은 결국 질문하고 탐구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그리고 탐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의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한일장신대 차정식 교수가 글을 하나 섰습니다.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라는 책입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설명이 나옵니다.


신앙생활이란(무엇인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여쭙고, 또 그 뜻을 알아내기 위해 치열하게 탐구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의해 발견되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속에서, 우리들이 겪는 일들 속에서, 하늘과 땅과 바람 속에서, 산과 강과 계곡에서, 때로는 피어나는 꽃과 잡초들 속에서, 농부들의 땀방울 속에서, 이웃들의 눈물 속에서, 광장에서 잠을 청하는 고단한 이웃들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볼 마음이 있으면 보입니다. 하지만 분주한 이들은 주님의 곁을 그냥 스치듯 지나가버리고 맙니다. 바삐 내달리는 이들의 귀에는 세미한 음성으로 말 건네시는 그분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분주한 일상을 끊고 가끔 멈추어 서야 하는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구하고 찾는다는 것은 먼저 우리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여쭙고, 또 그 뜻을 알아내기 위해 치열하게 탐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 그 구한 것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고, 우리가 찾는 것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한 비유가 9-11절에 나옵니다.

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7: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이 말씀의 핵심은 이런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우리가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더하여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뿐만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문문의 형태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당연한 사실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셈법으로는 잘 가늠하기 어려운 하나님 나라의 이치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우리가 구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찾는 것을 당연히 주시지 않겠는가라는 강조법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마음대로 하라

신앙의 근본이 바로 서면 나머지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 이제 12절로 넘어 옵니다.

12절은 우리가 흔히 '황금율'이라고 일컫는 구절입니다.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우리가 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의를 먼저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의의 사람,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12절을 새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 무엇인지 아는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으뜸 계명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남을 대접하대 하나님처럼 대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라는 것이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남을 대접하라

이 말의 뜻을 우리가 잘 새겨야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좋다고 남들도 다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하나 드리겠습니다.

숫사자와 암소가 결혼을 하였습니다.

남편인 사자는 아내인 암소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최고로 신선한 살코기를 구해다가 대접해주었습니다.

아내인 암소는 싫었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먹었습니다.

 

아내인 암소 역시 남편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아주 신선한 건초를 대접했습니다.

숫사자 남편 역시 입맛에 맞지는 않았지만 아내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억지로 건초를 먹었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던 어느 날 드디어 일이 터졌습니다.

더 이상은 못살겠으니 서로 헤어지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로가 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

물론 최선을 다 했지요.

하지만 문제는 상대방을 바로 알지 못하는 자기 방식만의 사랑이 상대방을 불편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십니까?

누구 방식대로요?

하나님 방식으로 아니면 내 방식대로...

그래서 남을 대접하는 일에 있어서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회 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의 속성 가운데 하나가 '지식'이다.’

서로를 잘 알아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 그 행위가 때로는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가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침 새벽기도시간에 읽은 말씀가운데 하나님의 성품을 잘 표현한 부분이 있어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요나서 42절입니다.

4: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요나가 알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요나는 자신의 뜻이 아니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새긴 후 원수 니느웨 성을 향하여 구원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정리 합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

그것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남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품으로 보듬어 안아 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대목에서 우리 주님을 이런 명령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러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계속해서 읽습니다.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예수님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친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613조의 율법 조문입니다.

하지 말라는 조문이 365개 그리고 하라는 조문이 248개입니다.

이렇게 613조의 율법 조문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다고 그들은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가르친 말씀은 달랐습니다.

613개의 문이 아니라 한 가지의 문 곧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가르치십니다.

그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으로요?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품는 마음으로 그리고 둘째는 남을 대접하는 손길로 그 좁은 문을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왜냐?

우리 주님의 답변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생명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구하고 찾으십시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그리고 문을 세차게 두드리십시오.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을

그래서 늘 예비 된 여호와 이레의 승리를 취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