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요한3서 1:1-10 사랑하는 가이오

心貧者 2018. 12. 19. 14:27

사랑하는 가이오

요한31:1-10절                                                                                                                  2015/6/19()

1:1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1: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1: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1: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1:6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1:7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1:8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1: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1:10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신약성경은 27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짧은 책이 요한3서입니다.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짧습니다. (요한2, 유다서)

 

요한 3, 요한이 보낸 세 번째 편지라는 뜻입니다.

편지형식의 글이기 때문에 이 글에는 편지를 받는 수신자가 등장합니다.

누구입니까?

11절에 나오는 장로 가이오입니다.

요한 3서가 씌어 질 당시 원시교회는 전문 목회자에 해당하는 목사의 직분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예배를 인도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역할을 교회의 어른이 되는 장로님들이 그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장로 가이오가 그런 경우입니다.

물론 가이오 한 사람만 장로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은 아닙니다.

9절 보면 디오드레베그리고 12절에서 데메드리오라는 두 인물이 더 등장하는데 이 분들도 교회 안에서 장로의 역할을 감당했던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목회하던 교회에 문제가 생겼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사도로서 목회 서신을 쓰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요한삼서라는 이름으로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장로 가이오를 비롯한 여러 장로들이 처한 문제는 어떤 것일까요?

이런 것입니다.

당시 소아시아에 있는 원시 교회마다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탁발 스님과 같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 설교자들에 대한 대우 문제입니다.

나그네 전도자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복음을 듣는 것 까지는 참 좋은 일인데 문제는 그들이 교회에 방문할 때마다 잠자리를 제공하고 먹거리를 제공하는 일이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떤 분들은 몇 개월 동안 머물면서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떠돌이 전도자들을 대접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시대도 아니고 또 지중해 지역에 임한 냉해와 가뭄으로 인해 먹거리도 부족했던 터라 여간 부담스러운 일로 다가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이들이 목회하던 교회가 두 패로 딱 갈라지게 됩니다.

우선 장로 가이오의 주장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형편이 좀 어렵더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떠돌이 설교자들을 어떻게든지 잘 대접하자는 것입니다.

복음의 확장을 위해 애쓰는 그들을 위해 우리가 좀 더 희생하자는 주장입니다.

 

반면, ‘디오드레베의 주장은 아주 현실적이고 합리적이었습니다.

가이오 장로의 주장이 옳기는 옳지만 하지만 그러기에는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성도들의 형편이 너무 어렵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좀 거부해야 할 때는 냉정하게 거부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두 주장으로 딱 갈라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주장이 더 옳다고 여겨지십니까?

복음의 진보, 복음의 확장을 믿고 떠돌이 설교자들을 선대하자는 장로 가이오입니까?

아니면 교인들의 형편을 우선 고려해서 할 수 없는 부분은 거부해 보자는 디오드레베입니까?

 

저는 누구의 편에 들것 갔습니다.

아마 가이오보다는 디오드레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1: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복음의 진보(확장)’를 생각할 때, 장로 가이오의 결정을 신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이오를 사도 요한이 이렇게 높입니다.

13절입니다.

1: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이라고 아주 높이 평가 합니다.

이것이 가이오에 대한 사도 요한의 평가입니다.

아무 대책 없이 믿음만 앞세우는 보수적인 사람처럼 우리 눈에 비춰졌지만 그야말로 진리 안에서 행하고 살아가는 그래서 진실한 믿음을 증언하는 사람이라고 사도 요한은 평가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요한은 또한, ‘가이오를 섬기는 사람,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칭찬합니다.

15절입니다.

1: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하나님뿐만 아니라 낯선 사람들에게도 신실했던 사람이 가이오였다는 것입니다.

마치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13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

15

형제 곧 나그네에게 신실한 사람

새 번역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낯선 형제들을 섬기는 일에도 충성을 다하는 사람

이것이 당시 원시 교회의 중직이었던 가이오가 보여준 참 신앙인의 모습이었습니다.

 

반면 합리적이었던 디오드레베에 대한 평가는 아주 박했습니다.

디오드레베역시 가이오처럼 당시 교회에 매우 영향력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요즈음으로 말한다면 교회의 수석 장로급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영향력을 디오드레베는 부정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디오드레베에 대한 사도 요한의 평가합니다.

1: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

이것이 사도 요한의 평가입니다.

하나님의 뜻, 복음의 진보 보다는 자기의 뜻, 자기의 의를 앞세우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디오드레베그 이름의 뜻은 풀면, ‘제우스에게 양육 받음이 됩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양육을 받는 사람이라는 아주 좋은 뜻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디오드레베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 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옛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어진 이름이 디오드레베입니다.

얼마나 축복되고 멋진 이름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이름값도 하지 못하는 교회 공동체의 걸림돌이 되어 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덧 자신도 모르게 복음의 진보를 가로 막는 불순종의 사람, 교만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은 저를 볼 때, ‘가이오처럼 보입니까?

디오드레베처럼 보입니까?

여러분이 저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모르겠지만 속일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목사의 연륜이 쌓이고 쌓여 가면서 가이오의 모습보다는 점점 디오드레베로 제 자신이 변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의 진보보다는 자꾸 현실이 더 앞서 갑니다.

 

예전에는 저를 목사로 보는 분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제가 목사라고 밝혀도 잘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즈음 들어 저를 목사로 알아보는 사람들이 부적 많아졌습니다.

말투나 행동 속에서 목사 냄새가 나는 모양입니다.

좋기는 하지만 염려가 되는 분분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진보, 복음의 열정보다는 목사라는 형식과 외형이 더 크게 비쳐진 것은 아닌가에 대한 염려 때문입니다.

 

디오드레베

물론 디오드레베처럼 현실감을 잃지 않는 합리적인 사람이 교회 안에 꼭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 시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꼭 하나 있습니다.

바로 복음에 대한 도전입니다.

가이오처럼 복음의 진보를 이루기 위한 신앙의 도전이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그리고 우리 교회가 처한 현실, 물론 큰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 현실에만 매몰되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자기 공만 이야기 하고, 자기 이름만 높이는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 디오드레베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현실에 매몰되기 말고 가이오처럼 복음의 진보를 이루기 위한 신앙의 도전을 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그랬을 때 그 유명한 3박자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 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1:2 사랑하는 이여, 나는 그대의 영혼이 평안함과 같이, 그대에게 모든 일이 잘 되고, 그대가 건강하기를 빕니다.

영혼의 평안함모든 일이 잘 되는 형통함건강

얼마나 멋있습니까?

복음의 진보, 복음의 도전을 통하여 이러한 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