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마태복음6:25-34 염려하지 말라

心貧者 2018. 12. 19. 14:25

염려하지 말라

마태복음6:25-34절                                                                                                             2015/6/21(주일)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요즈음 뉴스를 볼 때마다 아주 속상합니다.

마치 종말의 때가 온 것처럼 모든 것이 다 불안합니다.

 

국가안보, 불안합니다.

북한은 연일 으름장을 놓고 있는데, 19살 북한 병사 한 사람에 의해 군사분계선이 뚫렸습니다. 철통보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키 163cm 몸무게 54kg의 아주 왜소한 체구를 지닌 19살 북한 청년 한 사람의 의해 보기 좋게 뚫렸습니다.

물론 이유는 있었습니다.

안개 때문이라는 것이 정부의 설명입니다.

 

국민보건, 역시 불안합니다.

메르스에 대한 불안감이 그 한계를 모르고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습니다.

대통령까지 직접 진화에 나서고 있지만 불안감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메르스중동 호흡기 증후군이 아니라 코르스한국 호흡기 증후군으로 이름을 바꿔 대처해야한다고 지적할 만큼 아주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아직 인천은 청정지역이라 그 불안감이 반감되어 있지만 메르스로 인해 사망까지 이른 지역의 민심은 흉흉함 그 이상입니다.

물론 메르스가 이렇게 확산된 데에도 이유는 있습니다.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낙후된 보건의식이라는 것이 정부의 진단입니다.

그래서 손 씻고, 문병하지 않고 이 두 가지만 지키면 된다고 합니다.

 

환경, 역시 불안합니다.

지난 주일이 감리교회가 지킨 환경선교주일이었습니다.

환경선교주일로 지켜야할 만큼 환경에 대한 불안감이 점점 더 해지고 있습니다.

4대강은 물이 넘쳐난다고 하는데, 특히 충청이북의 중부지역과 강원지역의 가뭄은 상상 이상입니다.

왜 이렇게 가뭄이 심할까요?

정부에 발표은 엘리뇨 현상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정치인이 아니라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국민의 한사람으로 바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책임 있는 정치입니다.

말 바꾸는 핑계정치 해명정치가 아니라 국민의 행복과 안전을 책임지는 책임정치를 우리의 위정자들이 펼쳤으면 합니다.

물론 그리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매사의 모든 일에는 책임 있는 주체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주체들이 책임을 다 할 때 백성들은 안전감을 느낍니다.

꼭 문제가 해결되어서가 아니라 해결 될 것이라는 신뢰, 그 믿음이 백성들에게 안도감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책임 있는 주체들이 자꾸 책임을 회피하고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는데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 안쓰럽습니다.

 

교회는 또 어떻습니까?

메르스와 가뭄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그 책임에 응답하지 않고, 이 모든 책임을 동성애자들과 이슬람 사람들에게 다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이것이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 일상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병든 자들을 위한, 애통하는 자들을 위한, 진리를 위해 핍박 받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 그 복음을 왜곡시키는 일들이 이제는 아무 일 아닌 것처럼 교회 안에서 일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분은 말합니다.

믿음이 좋은 전도사 총리가 지명되면 메르스도 가뭄도 진정된다고요.

세상에 그런 복음이 성경 어디에 나오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런데도 거짓 복음에 우리의 귀가 팔랑거리는 것을 볼 때 마다 그리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 대목을 생각하면서 제가 떠오른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요한계시록 9장에 기록된 아비소스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옛 시대가 끝나고 새 시대가 열릴 때 인류가 경험하게 될 재난과 고통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요한계시록 9장에 나오는 예언입니다.

9: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9:2 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

9:3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그들이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9:4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다섯 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일어난 일입니다.

하늘에서 땅에 별이 하나 떨어진 것입니다.

후기 유대교 랍비에 따르면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은 타락한 천사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그 타락한 천사가 무저갱의 문을 여는 열쇠를 받아 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저갱

아주 어려운 한자말입니다.

그 뜻을 물으면 선 듯 답하기 어려울 만큼 사람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한자말로 이루어진 단어입니다.

왜 꼭 이렇게 번역해야만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어려운 한자로 번역된 무저갱의 그리스어 원어는 아비소스입니다.

아비소스들어 보셨습니까?

처음 들어 보시지요.

다행인 것은 한국교회가 공인하고 있는 성경 새 번역판은 이 부분을 제대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9: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이 하나 있는데, 그 별은 1)아비소스를 여는 열쇠를 받았습니다. '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을 일컫는 그리스어


아비소스’, ‘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을 일컫는 말입니다.

심연을 뜻하는 영어 단어 어비스abyss’가 바로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개역개정은 그 뜻을 한자로 살려 무저갱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없을 무, 밑 저, 구덩이 갱

왜 이렇게 어려운 한자로 번역해야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저갱이란 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곧 지옥을 뜻합니다.

 

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

지옥이지요.

생각만 해도 끔직하고 두려운 곳입니다.

지극한 어둠만 있고 그 어둠 속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그 밑바닥의 끝을 알 수 없어서 더 두렵고 무서운 곳입니다. 이것이 무저갱, 지옥입니다.

 

지금은 경험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예전에는 땅굴이 참 많았습니다.

어릴 적 친구들과 전쟁놀이 한다고 학교 뒤 땅굴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한 줌의 빛도 없는 땅굴.

아무렇지도 않은 척 들어갔지만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습한 기운, 적응되지 않는 어둠, 그리고 불길한 기운 등

분명한 것은 그곳이 머물고 싶은 곳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빨리 탈출하고 싶은 마음 그 하나 뿐 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비소스, 무저갱 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있었습니다.

바로 메뚜기 떼입니다.

그저 풀이나 뜯어먹는 예사 메뚜기가 아니라 전갈과 같은 권세와 힘을 가진 메뚜기 떼입니다.

이 메뚜기 떼에게 하나님이 명령합니다.

이마에 하나님의 도장이 찍힌 사람 빼고,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골라서 해하라는 명령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무자비한 재앙이 선포된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재앙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록을 기록한 저자 요한은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재앙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는다는 믿음입니다.

 

조금 지나친 비약일 수 있습니다.

한 젊은 목회자의 예언자적 시각 차원이라고 보셨으면 합니다.

지금 시대를 굳이 이유하자면 아비소스 곧 무저갱의 문이 열린 재앙의 시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가 전 세계로 번져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메르스나 에이즈 같은 질병들의 공포입니다.

방사능에 대한 공포, 이것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사막화와 환경파괴, 이것 역시 심각한 수준입니다.

식량과 자원의 고갈 역시 미래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경제 대공항에 공포, 이것 역시 전 세계에 흐르는 기류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 어마어마한 재난의 가능성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무저갱의 문을 여는 열쇠를 받아든 타락한 천사와 어떻게 대적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 해답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산상수훈의 한 단락입니다.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삶이 얼마나 열악한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루하루 끼니를 잇기 어렵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시일 안에 그런 상황이 개선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정말 죽지 못해 사는 구차한 인생을 이어 가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무저갱까지는 아니겠지만 이미 그들에게 주어진 삶 자체가 무저갱 아비소스끝이 없는 추락이었습니다.

그러니 무슨 희망이 보이겠습니까?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루 한 끼도 해결하지 못하는 밑바닥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진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다.

그리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

이치에 맞는 말씀입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동의합니다.

문제는 이 부분입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라는 바로 이 부분이 현실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

세상 어느 누가 먹는 것 염려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 어느 누가 마시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걱정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구나 다 염려 없는, 걱정 없는 삶을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항상 현실이 문제입니다.

현실이 무저갱, 끝이 없는 어둠인데 어떻게 염려하지 않고 살아 갈 수 있겠는가라는 반문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 주님이 참 철없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걱정이라는 걱정은 다 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향해 뭐라고 충고하십니까?

걱정도 팔자다, 아무 염려하지 마

그러면서 아주 기가 막힌 비유 둘을 들어 말씀하십니다.

 

첫째 공중의 새를 보라는 것입니다.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어때요?

염려와 걱정 우리 전공이지요.

염려하고 또 염려하고 매일 같이 염려를 묵상합니다.(염려는 나의 목자시니...)

일이 해결되던가요?

염려로는 해결 될 일도 안 된다 것이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 ‘맡김의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잘 관찰해 보라는 것입니다.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떻습니까?

아직도 이 주님의 말씀이 한가롭고 낭만적인 교훈들도 보여 지십니까?

물론 믿음 밖 세상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셈법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셈법에서는 능히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구차한 현실 앞에서 굴복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그리고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라

그래서 하늘 아버지가 어떻게 먹이고 입히시지 그 은혜 아래 거해 보라는 것입니다.

 

다시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십시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얼빠진 짓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33절입니다.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