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마태복음 11:16-30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

心貧者 2018. 12. 18. 15:38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

마태복음 11:16-30                                                                                                            2015/7/5(주일)
11: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1: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1: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11: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11: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11: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1: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11: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11: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2015년이라는 단어도 아직 낯선데 벌써 절반이 지나갔습니다.

새로운 절반이 시작되는 7월의 첫 주일입니다.

7월의 첫 주일인 오늘은 많은 교회가 맥추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맥추감사절.

보리추수, 생소한가요 아니면 익숙한가요?

사실, 추수감사절처럼 마음속에 딱 다가오는 절기가 아닌 듯합니다.

왜냐하면 보리를 추수하여 얻게 되는 감사와 기쁨그 감사와 기쁨이라는 현실감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맥추감사절에 드리는 감사헌금은 다른 절기에 드리는 헌금보다 좀 더 부담스러워합니다. 종종 빼먹기도 하구요.

 

맥추감사절.

지금도 의문스러운 것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기원입니다.

언제부터 한국교회가 맥추절을 감사주일로 지켰는지, 그 기원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두 번째, 왜 유독 우리 한국교회만 구약의 3대 절기(유월절, 맥추절, 장막절)중의 하나인 맥추절을 계승하여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세 번째, 맥추절, 다른 말로는 칠칠절,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미 오순절이 5주나 지났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별도로 맥추감사절이라는 절기를 만들어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맥추절, 이스라엘 민족의 추수감사절입니다.

히브리 원어로는 '하그 하카츠르'라고합니다.

거두어들이는 추수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로 봄에 씨앗을 뿌리고 가을에 곡식 단을 추수합니다.

하지만 논농사가 없는 이스라엘은 그 반대입니다.

가을에 보리와 밀 씨를 뿌리고 봄에 보리와 밀을 추수를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추수감사절이 늦은 봄인 오순절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전통을 미국에 정착한 청교도들이 11월 셋째 주 추수감사절로 재해석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한국교회는 지구상 유일하게 유대인의 추수감사절인 맥추절과 미국인의 추수감사절인 추수감사절을 그대로 따르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물론 좋은 것을 따라하는 것 좋은 일입니다.

한국교회가 특별히 7월 첫 주를 맥추감사절로 지키는 것이 아주 의미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한 해의 절반을 감사하고, 다시 한 해의 절반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맞이한다는데 있어서 참 좋은 일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유대인의 추수감사절을 재해석하여 다시 보릿고개를 넘어 감사의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 참 좋은 일입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 신앙의 반드시 도움이 된다는 것 믿습니다.

하지만 약간의 아쉬움도 있습니다.

유대인의 맥추절을 왜 우리 한국교회가 추수감사절로 꼭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그리고 한국교회사적 근거가 아주 빈약하다는 것입니다.

해가 갈수록 점점 의미 없이 관습화 되어가고 있고,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맥추감사절을 볼 때마다 성서의 부재, 신학의 부재, 그리고 한국교회 전통의 부재라는 밑 낯을 그대로 들러내고 있는 것 같아 사실 젊은 목회자로서 부끄럽기도 합니다.

진정한 맥추감사절의 뜻과 그 의미 새기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감당해야할 한국교회의 숙제입니다.

 

이처럼 무슨 일에 있어서 진정한 의미와 그 뜻을 찾고 새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염된 전통과 그리고 그릇된 관습과 싸워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제가 아주 좋아 하는 말씀 한 구절이 나옵니다.

몇 절 말씀인 것 같습니까?

그렇습니다.

19절입니다.

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아무리 생각해도 제 안에는 예수님 닮은 구석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제대로 닮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부디 예수님처럼 잘 드시고 잘 마시면서 무더운 여름을 잘 지내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사실, 이 구절은 예수님을 향한 악의적인 모함입니다.

예수님의 뜻,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에 의한 모함이지요.

물론 예수님 이전 세례요한도 이런 모함을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 사람들이 뭐라고 평가합니까?

예수님과 전 반대지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다.’고 하면서 배척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다 싫다는 것입니다.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고, 무조건 싫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들의 거부와 불신에 대해 예수님이 적절한 비유 하나르 들어 주신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우리가 아주 잘 알고 비유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땅에 아주 유행했던 동네 아이들이 노는 놀이(게임)’의 비유입니다. 놀이 규칙은 이렇습니다.

놀이를 이끄는 한 녀석이 나무 막대기를 들고 피리를 신명나게 부는 흉내를 냅니다. 그러면 놀이에 함께 참여한 아이들이 마치 결혼잔치에 온 것처럼 다 같이 춤을 신명나게 추는 그런 규칙입니다.

 

그러다가 놀이를 주관하는 한 녀석이 이번에는 자기 옷을 찢는 시늉을 하면서 가슴 절절하게 곡을 하면 마치 장례식장에 온 것처럼 나머지 친구들이 다 같이 우는 것이 이 놀이의 규칙입니다.

아주 간단한 규칙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누구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말씀에 호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3: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세례 요한은 통곡을 하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외치고, 예수님은 그 반대로 피리를 불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쳤지만 어느 누구도 이 말에 호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호응하지 않았을까요?

율법의 전통이라는 아집때문입니다.

모세가 전한 율법의 전통 그리고 장로의 유전이라고 하는 미쉬나의 전통에 따라 살 테니 더 이상 참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율법에 담긴 진리관심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참 뜻알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거 골치 아프니 그저 우리 몸에 배인 대로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람들을 꽉 붙잡고 있던 삶의 방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율법입니다.

우리가 오직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오직 율법입니다.

오직 율법.

율법에 명기된 절기와 규례를 지키고, 정결법의 규례를 지키고, 제사법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 그들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본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여러 가지로 나열 된 법 즉 규례를 지키는 율법중심의 삶입니다.

613가지의 계명과 그리고 그 계명을 시대에 따라 해석한 장로의 유전이라고 하는 미쉬나를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입니다.

 

매우 복잡하고 까다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그 방식을 고수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아주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우 복잡하고 까다롭지만 그 계명과 규례들을 생명으로 여기고 고수하게 됩니다. 오직 율법입니다. 오직 율법만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그들은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나타나서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고 하나님의 구원을 율법 안에서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는 이들에게는 정말 어이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얼마나 정교하고 완벽하데 돌이켜 회개하라니 사실 응답할 가치가 없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통곡을 하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외치고, 반대로 예수님은 피리를 불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외쳤지만 어느 누구도 이 말에 호응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특별하듯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 역시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미 태어날 때부터 천국행이 보장된 그들이 굳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게 귀를 기울어 회개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외치십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피리를 불면 너희는 춤을 추어야하고 그리고 내가 곡을 하면 너희는 함께 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너희가 이 시대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참된 지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11: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낸 지혜

그 지혜의 분별력을 너희들이 가지라는 것입니다.

관습, 율법의 한계 안에만 머물지 말고, 끊임없이 율법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고 그 찾아낸 진리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안식일. 지켰다고 만족하지 말고

그 안에 숨겨진, 그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너들 통하여 들어내게 하라는 것입니다.

정결법. 지금 정결하다고 만족하지 말고

그 안에 숨겨진, 그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너들 통하여 들어내게 하라는 것입니다.

구제와 금식과 기도 역시 그 의무를 다 했다 여기지 말고

그 안에 숨겨진, 그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을 너들 통하여 들어내게 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여기서 말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란 가난하고 무식한 백성이 지기 어려운 율법의 짐, 장로의 유전을 말합니다.

그 짐을 지고 헉헉거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난한자도 그리고 무식한 자도 질 수 있는 짐, 곧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그 가르침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멍에, 그리고 긍휼이라는 짐을 지고 내게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에 결론입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사랑의 멍에, 긍휼의 짐을 지고 무엇을 배울까요?

그것은 율법의 본 뜻 곧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입니다.

마태복음 7:12, 22:37~40, 23:23입니다.

차례대로 찾아보겠습니다.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