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을 보고 우셨다
누가복음 19:41-46절 2018/04/20(금)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19: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19: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19: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19: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19: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풍수지리학이 말하는 우리나라 4대명산 중에 하나가 계룡산입니다.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 덕유산)
계룡산의 정상이 ‘천황봉’인데, 그 정상의 높이가 845미터입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꼬박 4시간을 올라가야 오를 수 있는 제법 높은 산입니다.
그런데 이 계룡산의 정상보다 5미터 더 높은 해발 850미터 높이의 구릉 위에 세워진 도시가 바로 거룩한 도시, 성도라고 불리는 예루살렘입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입니다.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여기에 보면 ‘산 위에 있는 동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런 동네가 없기 때문입니다.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말처럼 산을 등지고 앞에 물이 흐르는 곳에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우리의 마을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학동처럼 산자락이나 물가에 집을 짓고, 마을을 형성하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처럼 산자락이나 물가에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산꼭대기에 집을 짓고 마을을 형성해서 사는 것이 이스라엘의 주거 특징입니다.
예외인 곳이 갈릴리 호숫가에 자리 잡은 갈릴리 주변 마을들인데, 그래서 갈릴리는 늘 이방인들에 의해 수탈당하는 대상이 되었고, 이방인의 땅이라는 수치스러운 별명을 늘 달고 살아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합리적인 질문을 갖게 됩니다.
‘왜 하필 산꼭대기일까?’
‘마을을 형성하는 핵심요소가 물인데, 왜 하필 물도 나지 않는 산꼭대기에 집을 짓고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을까?’
의외로 이유는 간단하지만 여기에는 뼈아픈 경험이 숨어 있습니다.
그나마 그곳이 가장 안전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애굽, 블레셋, 미디안,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터기, 요르단 시리아 등등등.
강대국들로부터 늘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을 때, 그나마 그곳이 가장 안전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왕 중에 왕이라는 부른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요새 나의 산성 나의 반석’이라고 찬양한 것은 단순한 감성이나 단순한 감사가 아닙니다.
경험 속에서 나오는 뼈아프게 아픈 눈물이자, 진심어린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이 ‘평화의 언덕’이라는 부르는 예루살렘에 수도를 정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물’구하기 가장 어려운 곳에 대도시를 건설하고 성을 쌓고 그곳에 성전을 지은 이유 역시, 분쟁의 땅에서 어떻게든지 살아남고자 하는 연약한 자의 생존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세워진 도시가 산 위에 있는 동네 바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우리가 ‘시온’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시온’이라는 말은 ‘요새’ ‘철옹성’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요새, 하나님이 지키시는 철옹성.
이것이 시온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품고 있는 두 산자락이 마치 하나님의 두 팔이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을 ‘시온’ 곧 하나님의 요새 하나님의 철옹성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온 위에, 그것도 모자라 헤롯대왕 시대에 예루살렘 성벽을 더 높이 재건하고, 부실했던 대문까지 다시 든든하게 새롭게 달아났으니 얼마나 위대하고 든든하고 자랑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십니다.
남들처럼 환호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한탄의 눈물, 비통의 울음을 터뜨립니다.
눅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우셨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는 ‘엑크라우센’입니다.
복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려 소리 내어 우는 통곡을 말합니다.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통곡했다는 것입니다. 벅찬 감동과 희열 때문에 눈물을 보이신 것이 아니라 아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통곡의 눈물, 슬픔의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상한 점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마치 인격을 지닌 사람 취급을 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시선은 누가복음 13장에도 동일하게 나타나십니다.
눅13: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사람이름 부르듯 예루살렘을 부르십니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해 보면 이런 결론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고 우셨던 것은 물리적인 건물로서의 예루살렘 성이 아닙니다. 그 안에 살아가는 자기 백성, 곧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고 우셨던 것입니다. 그것도 ‘엑크라우센’, 울음을 터뜨려 소리 내어 우는 통곡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란 ‘예루’라는 말과 ‘살렘’이라는 말이 합해진 복합어입니다.
‘예루’라는 말은 ‘도시’, ‘성읍’이라는 뜻이고, ‘살렘’이란 ‘샬롬’ 평화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그 둘을 합하면 ‘평화의 도시’ ‘평화의 성’, 이것이 예루살렘입니다.
문제는 그 뜻과 달리 그곳에는 하나님의 정의가 숨 쉬는 평화, 하나님의 공의가 펼쳐진 화평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온갖 도둑놈들로 득실거리는 강도의 소굴로 변질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제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백성이 드리는 젯밥, 돈입니다.
바리새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체면이지요.
정치지도자들과 장로들, 오직 권력과 명예와 돈입니다.
성 안에 주민들, 마치 뽕 맞은 사람들처럼 로마의 황제와 헤롯대왕이 준 가짜 평화에 취해 있지요.
그러니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자마자 통곡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
그 안에는 평화를 가장한 가짜들, 즉 남을 헤치고 피해를 주는 도둑놈들로 넘쳐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자마자 예수님이 제일 먼저 하신 것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강도의 소굴을 쓸어버리시고, 그 도둑놈들을 내어 쫒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성전 정화사건이라고 부릅니다.
가짜 평화, 가짜 평안을 사고파는 그 도둑놈들을 다 내어 쫒으신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19장 42절입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이 자신의 소원을 이렇게 밝히십니다.
눅19: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너희 눈에 숨겨진 평화를 지금 찾으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 야합으로 만들어진 인위적이고 한시적인 평화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 온 평화, 그 영원한 평화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해서입니다.
에베소서 2장입니다.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공동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2:13 이렇게 여러분이 전에는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2:14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 눈에 숨겨진 평화, 그 평화를 누구로부터 찾으라고 말합니까?
그리스도입니다.
피를 흘리심으로써 하나님과 멀리 떨어진 우리를 가깝게 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바울의 확신 찬 목소리가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평화를 무시하는 이들, 평화를 알려하지 않은 이들 어떤 결과가 주어질까요?
눅19: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19: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나님의 보살핌 곧 하늘의 은총이 없는 날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날입니다.
그러니 평화를 구하고, 평화를 찾고, 참된 평화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해서입니다.
그분의 말씀, 그분의 행실, 그 하나하나를 통해서, 평화를 구하고, 평화를 찾고, 참된 평화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라는 고백이 지배하는 축복의 삶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평화의 왕이신 주님과 함께 이 영광의 자리, 이 축복의 자리로 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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