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한 믿음:breakthrough
사도행전2:22-24 2018/04/15 부활절 제3주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오늘 우리에게 그리고 고난 받은 이들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느덧 4월의 중순입니다.
제법 산들도 푸르러졌고 봄꽃도 여기저기서 지천입니다.
나들이하기 참 좋을 때인데, 추천 한 곳을 해 드리겠습니다.
종묘와 창경궁입니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종로 3가에서 내리시면 종묘가 나옵니다.
종묘에 가서 꼭 보셔야 할 것이 조선의 역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신 정전과 영녕전입니다.
왜 조선이 종묘와 사직의 나라인지.
그리고 조선은 왜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려 했는지?
꼭 한 번 가셔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들러볼 곳이 종묘 바로 위에 있는 창경궁입니다.
옛날 어르신들은 창경궁보다는 창경원이라는 말이 더 익숙할 텐데,
지금은 창경원이 아니라 창경궁이라고 부릅니다.
창경궁, 생각보다 제법 넓고 볼 것도 참 많은 곳입니다.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울 때가 지금이니, 꼭 한 번 나들이 가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부활절 제 3주를 보내고 있습니다.
다음 주가 부활절 제 4주, 그 다음 주가 부활절 제 5주, 부활절 제 6주, 부활절 제 7주 이렇게 50일을 보내게 됩니다.
50일.
우리 성경을 이것은 한자로 오순五旬이라고 표현하는데,
한 순은 열을 뜻합니다.
여기서 질문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달려 돌아가신 유월절로부터 시작해서 50일 즉 오순이 되는 날, 그 날 무슨 일이 벌어갑니까?
그렇습니다.
성령의 파루시아, 성령의 강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날의 사건을 우리가 오순절 성령강림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교회의 시작이지요.
대게의 경우 이 날을 기념해서 부흥회나 사경회를 엽니다.
‘팩트체크’ 한 번 하고 오늘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해 마다 부활절이 되면, 부활의 증인으로 항상 으뜸으로 언급되는 분이 있습니다.
그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과연 창녀였는가에 대한 ‘팩트체크’입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첫째,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에 맨 처음 무덤가로 달려간 것이 막달라 마리아였다고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그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과거에 예수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신 여자라고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 어디를 보아도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주의 깊게 살피지 않은 이들로 인해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설교를 거름망 없이 들어야 했고, 또 그 폭력과 무지 앞에서 무기력하게 순응하는 이들이 교회 안에 존재한다는 것 역시 여전한 현실입니다.
과연 그럴까?
과연 막달라 마리아는 부정한 여인 창녀였을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것은 여성들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교회의 그릇된 권위가 유포했던 거짓 뉴스였습니다.
정경에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초대교회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문서들 즉 외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외경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로 요한이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바로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늘 멸시의 대상이었던 일곱 귀신 들린 자신을 처음으로 사람대접해 주었고,
‘마리아야’라고 자신의 이름을 진정성 있게 불러준 유일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깊이 이해할 수 있었고,
예수님의 사랑 받는 제자, 곧 애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한 증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큰 은총을 받은 가장 가난한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한 여인이 물속으로 한없이 끌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라앉음’ 이지요.
바로 그것이 십자가에서 스승을 잃은 제자들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여인들의 심정이었습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의 끝없는 ‘가라앉음’ 이지요.
그것은 절망이었고 낙심이었고 도저히 떠오를 것 같지 않은 아득함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성 금요일 오후부터 안식 후 첫날 새벽까지, 그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끝없는 절망의 심연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몸을 먼저 일으킨 것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이것이 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의 첫 장면입니다.
쿰, 일어섬 이지요.
그렇게 해서 가장 비천하고 가장 가난한 여인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입니다.
절망의 자리 낙심의 자리 도저히 변화하지 않을 것 같은 아득함의 자리를 저항하면서 박차고 일어설 때,
‘쿰’ 하면서 먼저 일어설 때,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하는 증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베드로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을 보시면 복음서에 기록된 것과 전혀 다른 베드로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데 바로 담대함입니다.
비겁함을 저항하며, 일어서는 담대한 믿음이지요.
복음서에 기록된 베드로의 모습은 세상의 힘과 폭력 앞에 주저앉아,
어쩔 줄 모르는 나약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불의하고 거짓된 것은 알았지만 세상이 정해 준 질서 앞에 아주 쉽게 순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자기 목숨, 곧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넘지 못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잡히시던 날입니다.
수제자답게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까지 예수님을 따라갔지만 문지키는 어린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 시작한 베드로는 그곳에서 두 번 더 예수님을 부인하는 못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렇게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명색이 예수님의 수제자 아닙니까?
입만 살아 있는 다른 제자와 달리 거사에 쓰일 칼까지 준비한 인물 아닙니까?
심지어 예수님을 결박하러 온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편 귀까지 자른 인물 아닙니까?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저항할 수 있었던 그 용기, 그 기상은 어디에 간 것입니까?
좀 아쉽지요.
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자 베드로는 이런 결정을 내립니다.
요한복음 21장입니다.
나중에 부록으로 첨가된 부분이지만 아주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는 곳으로 1-3절을 보겠습니다.
21: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1: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21: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다.’
이것이 복음서에 그러진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옛 삶으로의 복귀를 선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완전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그 유명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입니다.
한때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
고 말하면서 옛 삶으로 복귀했던 그 사람이 이렇게 선포합니다.
사도행전 2장 22-24절입니다.
2: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공동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2:22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내 말을 들으시오. 나자렛 예수는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것을 분명히 보여주시려고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 가지 기적과 놀라운 일과 표징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사실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2:23 그런데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여러분의 손에 넘어간 이 예수를 여러분은 악인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2:24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되살리시고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계실 분이 아닙니다.
이렇게 막달라 마리아처럼 베드로도 부활의 담대한 증인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되살리시고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계실 분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급격한 변화, 이 변화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실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가진 합리적 이성, 논리적인 지성으로는 사실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떤 실체가 베드로로 하여금 이런 변화를 이끌어 냈을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성령의 체험입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파루시아, 성령의 임재입니다.
성령이 베드로에게 임하자
딱딱하게 굳어진 베드로의 자아와 관습의 균열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이라는 어둠의 장막 현실이라는 안주의 장막을 찢어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부활로 온 새로운 새 생명의 질서에 뛰어들게 하는 돌파, breakthrough(브레이크스루)의 힘 곧 담대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디나미스, 권능입니다.
그렇게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는 그리스도의 사도로 새롭게 빚어진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요즘 들어 두렵고 떨림으로 상기하게 되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6절입니다.
10:26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무기력하게 보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의와 거짓과 가식이 힘을 얻고 살아갑니다.
세월호 304명의 죽음 앞에서 보인 위정자의 불의와 거짓과 가식의 눈물.
하지만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덮어 둔 것이라고 해도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라 해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이는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입에 달고 살아간다고 하나님의 시간 속에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이 임하시면 반드시 불의와 거짓과 위선은 폭로되게 마련입니다.
이 엄중한 사실이 극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주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한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요21:3)고 말한 아주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자기의 스승을 십자가에 넘겨주고 죽음으로 몰아 간 이들 앞에서 이처럼 당당하게 예수님의 이름과 그가 지신 십자가를 자랑하고 부활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의 권능 즉 breakthrough(브레이크스루) 돌파입니다.
죽음과 절망과 거짓과 위선과 불의를 돌파하는 힘, 담대함이었습니다.
담대한 믿음,
이것이 나약함에 빠진 우리교회가 회복해야할 힘이요. 부활의 능력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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