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요한일서 1:3 사귐의 기도 2

心貧者 2018. 5. 3. 10:41


사귐의 기도 2

요한일서 1:32018/05/02()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공동1:3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목적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귀는 친교 즉 삼위일체 하나님과 이심전심以心傳心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되는 사귐의 기도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사귐의 기도란?

은총의 수단으로 허락된 기도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깊고 넓고 높은 사귐(코이노니아 κοινωνία)을 형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처음 빚은, 그 원형의 형상(原形像)으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녀 됨이지요.

 

창세기 126-27

1:26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27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이처럼 사귐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첫째, 감히 바랄 수도 없는(焉敢生心)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사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무 공로 없는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을 더 깊고 넓고 높이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셋째, 죄인 된 우리가 감히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기도에 현 주소는 답답하게도 이런 본질적인 관계를 놓칠 뿐만 아니라 여러 현실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리스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가?

우리가 기도에 사용하는 시간과 정성은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한 다는 사실을 실재로 드러내는가?

우리의 기도가 일방통행은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 지는 관심도 없고, 우리가 하고 싶 은 말만을 쏟아 내는 형편이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과 더 행복하게 만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늘 같은 식, 늘 같은 방법 그리고 늘 같은 멘트의 기도는 아닌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자랐으며, 그분에 대한 우리의 지식(지혜)과 명철(분별력)은 얼마나 깊어졌는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며 하나님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느끼는 마음의 일치를 얼마나 경험했는가?

이렇게 본다면 기도자의 이미지는 사생결단死生決斷 일사각오一死覺悟로 임하는 씨름하는 야곱 보다는 시편 131편의 이미지가 더 가까울 것입니다.

131:1 야훼여, 내 마음은 교만하지 않으며 내 눈 높은 데를 보지 않사옵니다. 나 거창한 길을 좇지 아니하고 주제넘게 놀라운 일을 꿈꾸지도 않사옵니다.

131:2 차라리 내 마음 차분히 가라앉혀,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 내 마음 평온합니다.

131:3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야훼께 두어라.

 

오해하지 마십시오.

사생결단死生決斷 일사각오一死覺悟로 임하듯 씨름하는 야곱의 기도를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그렇게 기도해야 할 절박할 순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도가 일상의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마음에 품고 소망해야할 기도는 시편 131편 즉 내 마음 차분히 가라앉혀,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입니다.

 

시편 131편을 보면, 기도하기 전 기도자의 아름다운 자세가 등장합니다.

다윗은 기도자인 자신의 마음 상태를 먼저 밝히는데, 그것은 기도 전 아주 중요한 단계이자 자세로 3가지의 일을 적극적으로 부정(부인)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131:1 야훼여, 내 마음은 교만하지 않으며

내 눈 높은 데를 보지 않사옵니다.

(오만하여 남을 낮잡아 보지 않사오며)

나 거창한 길을 좇지 아니하고 주제넘게 놀라운 일을 꿈꾸지도 않사옵니다.(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그리고 이 모든 자기 부인(자기 부정)의 과정을 거친 후 얻어지는 기도자의 자세가 내 마음 차분히 가라앉혀,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입니다.

더 이상 바랄 것도 무서울 것도 없는 세상을 다 얻은 자의 모습이지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희망)을 두고, 그분과의 깊고 넓고 높은 사귐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131:3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야훼께 두어라.

 

어떤 분은 지적합니다.

이런 기도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정적이고 소극적인 것은 아니냐고?’

한국인 체질에는 주여 삼창이 기도의 진리이자 정석이라고?’

하나님의 사자와 밤새 씨름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뤄 낸 야곱의 기도가 더 능력 있는 기도라고?’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한 다윗이 보여 준 영성의 깊이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사귐에 이르고

그 관계 안에서 새로운 소명을 발견하며

헌신하는 것.

이것이 다윗이 보여 준 영성의 깊이 이자, 내 마음 차분히 가라앉혀,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기도하는 영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도의 영성을 이 땅에서 완성의 본을 보여 준 분이 그리스도시고, 그것을 이어간 분들이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 초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야곱처럼 씨름하는 기도내 마음 차분히 가라앉혀,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기도하는 영성으로 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사귐의 기도에 있어가 가장 큰 난제는 하나님이 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물질과 자본주의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영이신 하나님없는 것과 같은 하나님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 실재 한다는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마저도 물질화(대형화)시키고, 물질의 유무에 따라 은총의 척도로 삼는 천박한 신앙에서 영이신 하나님없는 것과 같은 하나님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귐의 기도는 없는 것과 같은 하나님을 알아 볼 수 있도록 마음을 모으고, 물질(시간, 공간) 너머에 있는 영이신 하나님과의 사귐 안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미국의 신학자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 1942-2015)의 말입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분으로 대한다면, 기도를 저 멀리 계실지도 모르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지도 모르는 어떤 존재에게 말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여기그리고 온 누리에계시며 우리가 알든 모르든 이미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분으로 안다면, (말로 하든 혹은 말 없는) 기도는 하나님과 관계를 시작하고 그 관계를 성장시키는 의식적인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해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귐의 기도는 우리의 내면 깊이 숨어 계신 영이신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 앞에 전심으로 머무는 것이며, 온 우주를 품고 계신 그분께 나아가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일이며, 부산하게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적극적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마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머물렀듯이(10:39), 젖 뗀 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겨 있듯이, 하나님의 친교 앞에 머무는 것이다.

그래서 없는 것과 같은 하나님을 알아 볼 수 있도록 영이신 하나님과 실제로 사귀는 친교의 은총을 얻는 것입니다.

감히, 죄인인 주제에 말입니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어 기도했는데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습니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것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주셨습니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한 삶이었지만

내 마음 속에 진작 표현하지 못한 기도는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