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고린도전서 1:1-3 예배 자가 있는 교회

心貧者 2018. 5. 8. 10:48


예배 자가 있는 교회

고린도전서 1:1-32018/05/04()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오늘밤은 교회가 어떤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를 바라 볼 때 세상의 것과는 좀 다르다고 여깁니다.

교회가 어떤 곳인지는 잘 몰라도 어찌되어든 자신들과는 무엇인가 달라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이고 상식입니다.

 

그래서 다른 곳과 달리 교회의 행정, 교회의 인사, 특히 교회의 재정은 세상의 그 어떤 곳보다도 반듯하고 투명해야 한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정한 기대치에 조금만 어긋나도 세상은 교회를 향해 바로 한 마디를 던집니다.

교회가 왜 그래?’

 

교회.

참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그 중에서 단연 으뜸이 저는 교회의 사유화라고 생각합니다.

탐욕으로 말미암은 사유화이지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매매와 세습, 그리고 교인을 대상으로 하는 성적 범죄와 교회 재산 횡령은 이제 그리 큰 뉴스거리도 아닙니다.

 

문제는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기준은 점점 엄격해 지고 높아만 가고 있는데 반해, 우리 교회는 그 기대와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아주 안타까운 현실이지요.

그러니 교회 공동체 안에서 대학교 출신 세대인 30대와 20대가 급격하게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덩달아 그들의 자녀인 교회학교 역시 처참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지요.

 

사실 교회의 사유화와 탐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어느 시대든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괜히 예수님 시대 '강도의 소굴'이라는 표현까지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교회의 사유화는 그릇된 물질관 곧 '부의 대한 탐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

하지만 그 공동체를 부패시키는 가장 무서운 힘은 부에 대한 탐욕에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도 하나님과 맞설  있는 유일한 대상으로 돈, 부를 거론했겠습니까?

그만큼 부에 대한 탐욕은 아주 치명적입니다.

 

아무리 성령이 부에 대한 탐욕에 걸린 교회를 위해 우시고아파하시고권고하셔도 나도 인간이야 나도 사람이야 나도 먹고 살아야지그렇게 끝까지 우기면 하나님도 방법이 없습니다.

 

이번 주일에 가난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이라는 말씀의 제목으로 좀 더 심도 깊게 나누겠지만 교회는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인은 가난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게을러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흙 수저로 태어나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탐욕을 거부하고, 불의를 거부하고, 부정을 거부하고, 이 땅의 거짓을 거부하고, 이 세상의 강함을 거부해서 오는 하늘의 능력으로서의 가난을 말합니다.

 

그래야 하늘의 약함으로 세상의 강함을 이기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비록 가난하게 보여도 교회 공동체가 함께 먹고 살  있는 나눔의 능력 사랑의 능력만 가지고 있다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 없다는 것이 저의 목회 소신이자, 제가 최고의 가치 최고의 재산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고린도 교회

참 부요한 교회였지요.

지역 특성 상 모자람이 없는 참 부유한 교회였습니다.

부자 교인이 많기로 소문난 교회였습니다.

 

문제는 그 부유함을 거듭난 후에도 자신만을 위해 사용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여러 문제를 고린도 교회가 만들어 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근친상간과 성적 타락입니다.

5장입니다.

상속된 재산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의 아내와 동거 하는 일이 나오고

6장에 가서는 창녀와 잠자리하는 것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여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에 대한 자기 과시이지요.

 

뿐만 아니라 툭하면 세상 법정에 가서 소송을 제기합니다.

재산 상속과 관련된 민사 소송을 주로 제기합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초대 교회의 예배인 성만찬을 모독했지요.

내가 낸 돈으로 내가 차린 식탁이니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그릇된 우월의식이 부자 교인들 사이의 팽배했습니다.

그러니 가난한 교인이나 종이나 노예들은 늘 찬밥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이렇게 재평가합니다.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여기에 보면 고린도 교회에 대한 두 가지 평가가 나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

또 하나는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 있는 공동체

 

다른 표현이지만 실은 같은 말입니다.

도대체 사도 바울이 이런 결론을 짓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앞서 설명한 것처럼 문제가 이만 저만이 아닌 교회가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파벌과 파당의 문제, 근친상간의 문제, 성적 타락의 문제, 우상에게 드린 제물문제, 이혼문제, 독신문제, 방언으로 인한 교회의 권위 훼손문제, 은사 자랑으로 인한 영적 분별력 상실문제, 그리고 구제헌금 문제, 성만찬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태 그리고 복음의 핵심인 부활 논쟁 등 정말 교회가 안고 있는 온갖 문제를 가지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높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도대체 바울은 문제투성이인 고린도 교회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요?

 

고린도전서 19절로 넘어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본 것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즉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를 갈망하는 성도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무엇을 통해서요?

10절입니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는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그래서 교회 생활의 모든 기초를 공동체 예배에 두는 것입니다.

공동체 예배만이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자 유일한 시간이자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교회 안에 산재 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 예배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문제와 혼란을 잠잠케 하는 유일한 힘이 공동체 예배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그것을 본 것입니다.

혼돈 속에서도 하나님과 교제를 이어가는, 분열 속에서도 그리스도와 친교를 갈망하는 예배 자가 있다는 것을 본 것입니다.

예배 자입니다.

뒷짐 지고 끌탕 짓는 방조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갈망하는 예배자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선지자 아모스에 따르면 종말에 이런 심판이 일어난다고 예언합니다.

8:11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내릴 날이 멀지 않았다. -주 야훼의 말씀이시다. 양식이 없어 배고픈 것이 아니요,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야훼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굶주린 것이다.

8:12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녘에서 동녘으로 돌아다니며 야훼의 말씀을 찾아도 들을 수 없는 세상이다.

8:13 그 날이 오면 아름답고 씩씩한 젊은 남녀들도 목이 타서 쓰러지리라.

 

지금 우리는 아름답고 씩씩한 젊은 남녀들도 목이 타서 쓰러지는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누가 이들에게 먹을 것을 줄 것이며 누가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겠습니까?

 

희망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교회를 향해 꿈꾸었던 바울의 비전처럼 신실한 예배자로 부터입니다.

우리 주와 참된 교제를 갈망하는 신실한 예배자로 부터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교회가 왜 그래?’ 끌탕이나 짓는 방관자 되지 마십시오.

신실한 예배 자가 되십시오.

에배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하나님과 만남이 없는, 예배의 언저리에만 왔다 같다 하는 방관자가 되지 마시고 이 시대의 참된 예배자로 다시 세움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