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마태복음 6:9 주기도문 강해④

心貧者 2017. 9. 9. 11:54


주기도문 강해

마태복음 6:92017/09/6()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사람들은 흔히 기도를 영적호흡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마치 사람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호흡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그리스도인의 기도를 왜 호흡으로 비유했을까요?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생기 루하흐’)이라는 절대적인 가치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을 부여 받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은총의 수단(도구, 통로)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교파를 떠나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가 우리의 거룩하지 못한 행실이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으로 변화되는 경건의 수단으로 기도를 뽑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움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숨 쉬는 것만큼 쉽고 자연스러운 행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7, 흙으로 지은 사람에게 불어 넣어주신 하나님의 생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우리의 몸이 스스로 생명의 호흡하는 것처럼 또 요한복음 2022, 우리를 향해 숨을 내쉬며 하신 말씀 성령을 받으라.’에 따라 우리의 몸에 그리스도를 자연스럽게 영접하는 것처럼 쉽고 자연스러운 행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속성입니다.

호흡이 지속되지 않으면 그 몸은 사망 선고를 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은총(경건)의 수단그리스도인의 기도가 멈추면 그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사망 선고를 받게 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보낸 첫 번째 편지 말미에서 죄와 거짓 선지자의 유혹(시험) 속에서 흔들리는 그리스도인들 향해 이런 권면을 합니다.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쉬지 말고.’

그릇된 해석을 초래할 수 있는 오해의 소지가 약간 있는 번역이지만 그 본뜻은 이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멈출 수 없는 거룩한 행실로 몸의 호흡처럼 끊임없이(항상) 하나님을 향한 마음(향심向心)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향심기도 centering prayer)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호흡, 하나님과의 대화인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불편하거나 힘들거나 단절되는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처럼 절대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선택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둘째, ‘외국어로 말하는 것처럼 기도가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설마 하나님이 이런 것까지 들어주실까?’ 하는 의구심 불신앙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기 전에 그릇된 기도, 잘못된 기도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심으로 참된 기도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 기록된 그릇된 기도, 세 가지 형태를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기도 생활을 잠시 점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자기 의를 드러냄(자기 자랑)으로 자기의 상을 이미 받은 기도.

둘째, 하나님이 아닌 누군가 내 기도를 들어 주었으면 하는 호소형 기도.

셋째, 빈말만 계속해서 되풀이 하는 주술형 기도

형태는 다르지만 이 모든 그릇된 기도의 뿌리에는 보여주기 식 기도 하나님과의 실재적인 관계나 깊은 교제(사귈통할) 없이 자신의 의나 자신의 행실만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외식(휘포크리노마이ποκρνομαι, 배우의 연기)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65-7절입니다.

6: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6:7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좀 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자기 의를 드러냄으로 자기의 상을 이미 받은 기도란 어떤 것을 두고 하는 말일까요?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범하기 쉬운 실수는 자기 의, 자기 믿음, 자기 지식, 자기 자랑을 은연중에 보여 주는 외식(外飾)에 있습니다.

겉모양은 그럴듯하지만 실상은 알갱이가 없는 기도이지요.

따라서 이런 분들은 먼저 자아라는 겉 사람이 죽고 그 속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님 자녀의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들딸로서 온전하고 올바르고 굳세어 지는 길로 가르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을 가르치거나 비방의 도구로 삼아서도 안 됩니다.

누가복음 189-14절입니다.

18: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은총의 도구(수단)로 삼아야지 자기 의를 드러내는 자랑의 도구, 남을 비난하는 비방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둘째, 누군가 내 기도를 들어 주었으면 하는 호소형 기도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요?

 

우리가 기도할 때 세상의 통로를 모두 끊고 골방에 들어가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기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를 유일하게 들으시고, 들으신 대로 갚아주시며 반드시 응답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이 반드시 갚아주시고 응답하신다는 믿음보다 공동체에 속한 이들의 동의와 도움이 있는 행동을 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호소형 기도입니다.

누군가 내 기도를 듣고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세상을 향한 사람을 향한 호소.

이 역시 우리가 흔히 범하는 실수 중에 하나이지요.

 

우리 주님이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은밀하게 기도하라고 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그 아버지 한 분만을 바라보는 향심(向心)의 기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121편입니다.

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121: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121: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121: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121:6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121: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121: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마지막 세 번째 빈말만 되풀이 하는 중언부언이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요?

그것은 의구심과 불신앙으로 드리는 기도를 뜻합니다.

기본적으로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청원입니다.

의미 없이 반복하는 주문이나 주술, 자기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간구이자 청원입니다.

마치 배고픈 아이가 아빠 밥 줘하는 것처럼 실제적으로 간구하는 것이 기도이고, 실제적으로 청원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도 중언부언, 빈말만 되풀이해서 8시간 12시간 시간만 채우려 한다면 그 보다 어리석은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참된 기도의 의미를 바르게 정립하고 정의해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자기 의를 드러내는 외식하는 기도를 벗어나 하나님의 의를 찾는 기도 곧 주의 이름으로 간구(청원)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교제(친교)를 나눌 수 있는 골방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산상설교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존재(Bing)의 의미를 가르쳐 준다면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주님처럼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살아갈 수 있는 길과 방법(Doing)을 제시해 주고 가르쳐 줍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고 하나님의 의를 행할 수 있는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둘째, 기도 그 자체가 예수님의 구원 활동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그 사랑의 신비를 깨닫고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 응답할 이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에 앞에 간구하십시오.

오직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셋째, 기도는 의미 없는 말만 되풀이 하는 중언부언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응답이 있는 자녀로서의 행동입니다.

구원의 행동이고 치유의 행동이고 사랑의 행동이고 자비와 긍휼의 행동입니다. 여기에는 노동도 영성도 사회참여도 들어갑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정 짓는 새로운 행동들이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 몸과 삶으로 흘러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기도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새로운 행동들을 요구하는데 온 세상을 치유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서로를 갈라놓은 간극을 메워 주는 평강을 북돋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