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요한복음 2:13-21 어떤 열심인가?

心貧者 2017. 9. 9. 11:45


어떤 열심인가?

요한복음 2:13-21                                                           2017/09/08()

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2: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2: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2: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2: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오늘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말씀의 주제는 217절입니다.

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 말씀은 구약성경 시편 699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신앙’, 껍데기 신앙이 주는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69: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주의 집이 어디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거하시고 머무시는 집이지요.

비록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축물 중에 하나이지만 그 건물, 그 집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믿음이 더해져서 우리가 성전이라고 특별히 구별해서 부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집 안에 거하신다는 믿음이지요.

이것이 이 땅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성전, 예루살렘 성전의 핵심이지요.

 

그런데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이 그 집 안에 거하신다는 믿음그 믿음의 본질은 사라지고 눈에 보이는 집, 그 건물에 대한 집착과 열심에만 매달리는 어리석음만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객전도이지요.

정작 있어야할 믿음을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분의 뜻과 그 분의 마음을 헤아리며 살아가는 열심히 가득해야하는데 피 비린내 진동하는 자기의 제사만 주구장창 드리는 못된 짓거리만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전도 된 예루살렘 성전, 이 건물을 가만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아무리 크고 웅장하다 할지라도 만유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 안에 거하는 하나님은 찾지 않고 자기의 제사만 드리는 행위의 장소, 그 건물을 유대인들이 하나님처럼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짜 성전이신 예수님이 볼 때 어처구니없지요.

그래서 219절 아주 특단의 조치를 내리게 됩니다.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결국 이 말씀 때문에 예수님이 경건한 유대인들로부터 고발을 당하게 되었고 죽게 되지요.

십자가에 달린 결정적인 죄목이 된 말씀이 219절입니다.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오늘 본문에 일어난 사건을 두고 훗날 사람들이 이렇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성전정화또는 예루살렘 성전정화

이렇게 부릅니다.

정화’, '淨化'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문자 그대로 풀면 더러워진 것을 깨끗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핵심은 깨끗함’ ‘성결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시대 예루살렘 성전이 어떠했다는 것입니까?

더러워졌다는 것입니다.

건물이 더러워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믿음과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 마음이 더러워졌다는 뜻일 것입니다.

 

본래 성전은 깨끗한 곳입니다.

순전하고 성결한 곳이지요.

왜요?

지고지순한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한 곳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사람들의 편리와 욕심 때문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온갖 거짓, 온갖 더러움, 그리고 온갖 불의함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마치 시장 통의 욕심 많은 장사치처럼 말입니다.

 

유월절 무렵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그렇듯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찾게 됩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다른 순례자와 마찬가지로 한껏 기대를 품고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성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때 예수님의 눈에 비친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는 거룩한 집, 성결한 집이 아니었습니다.

몸이 떨릴 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온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은 마치 시정잡배로 가득한 시장 통과 같았습니다.

경외감으로 가득해야할 순례자가 묵직한 침묵과 환희와 경건은 온데간데없고 순례자가 장사꾼과 흥정하는 소리만 가득했고 곧 제물로 팔려나갈 짐승들의 울부짖는 소리만 가득했던 것입니다.

충격이지요.

 

물론 이런 원인을 제공한 장사치나 이들에게 막대한 임대 수익금을 얻기 위해 장소를 제공한 제사장들의 변명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나름대로 합리적인 핑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핑계냐?

두 가지의 핑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전에 바친 제물에 대한 것입니다.

먼 곳에서 유월절 순례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제물로 바칠 짐승을 몰고 올 수 없으니 그들의 '편의를 위해' 제물로 바칠 만한 건강하고 흠 없는 짐승을 팔도록 편의를 봐 주자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럴듯하지요.

 

또 하나는 성전세 부분입니다.

성전에 들어가려면 어느 누구나 성전세를 반드시 내야합니다.

그런데 당시 통용되는 화폐에는 로마 황제의 얼굴이 그려졌기 때문에 그 돈 그대로 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황제의 형상이 없는 외국 은전 트리안 화폐반 세겔을 바치는 것이 관례가 되었는데, 이 역시 외국 은전인 트리안 화폐로 환전할 수 있도록  편의 상 환전상들의 상행위도 허용하자는 것입니다.

다소 무리가 있고 잘못은 있지만 종교적인 '편의를 위해', 이 정도는 성전 안에서 허용하자는 것입니다.

 

사실 먼 길을 떠난 순례자 입장에서는 아주 고마운 일이지요.

그런데 이런 관행적인 일에 대해서 불같이 화를 우리 주님이 내십니다.

215절입니다.

2: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그런 후 그들에게 이렇게 주의를 주십니다.

216절입니다.

2: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여기서 우리가 본질적인 질문 하나를 던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집이란 어떤 곳이고 또 무엇을 하는 곳인가? 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합니다.

그 답은 바로 긍휼의 집 자비의 집 시은 좌(施恩座)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은좌,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르는 자리이지요.

성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지성소입니다.

'至聖所'(holy of holies)가 예루살렘 성전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성전 안에서 가장 내밀한 곳에 위치한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단 한 차례,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지성소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을 지나 들어가면 만 날 수 있는 공간이 지성소인데 그곳은 창문도 없고 불빛 한 점 비쳐들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불빛 한 점 비쳐들지 않는 지성소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언약궤(ark)입니다.

이것 하나뿐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 두 돌판, 하늘의 만나를 담은 항아리, 아론의 지팡이 이 세 가지가 약속의 증표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언약궤는 순금으로 만든 속죄소(throne of mercy, mercy seat)가 덮개로 덮어 있는 데, 그 덮개를 우리가 시은 좌(施恩座) 은혜를 베푸는 자리라고 부릅니다.

이 시은 좌(施恩座) 은혜를 베푸는 자리

이것이 에루살렘 성전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시은 좌(施恩座)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그 자리를 인간의 편리와 탐욕으로 인해 장사하는 집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은혜의 자리가 장사꾼들이나 하는 거래의 자리, 흥정의 자리로 타락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분노할 수밖에 없지요.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형편과 우리 신앙의 현주소를 냉정하게 살펴보지요.

우리 교회를 그리고 우리 신앙을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시은 좌’ ‘은혜의 자리로 만들고 있는지요?

아니면 내 이익과 내 편의만 생각하는 그래서 주고받고 거래하는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고 있는지요? 한 번 깊이 고민해 보자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 된 우리 교회가 어떤 값으로도 매길 수 없는 은혜, 그 은혜가 넘치는 곳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기 여러분 첫째, 우리가 먼저 무엇보다도 시은 좌, 은혜의 자리로 나아갑시다. 보혈을 지나 나아갑시다.

그리고 둘째 덮어주시는 은예 그 은혜아래 머물러 봅시다.

그래서 오늘 밤이 시은 좌, 은혜의 자리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는 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