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역대하 33:10-13 므낫세

心貧者 2017. 9. 5. 11:02


므낫세

역대하 33:10-132017/09/03 성령강림 후 제13

33:10 여호와께서 므낫세와 그의 백성에게 이르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33:11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지휘관들이 와서 치게 하시매 그들이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간지라

33:12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33:13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성경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 중에서 아주 부정적으로 낙인이 찍힌 인물 두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사도 신경에 등장하는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원래 이름은 라틴어로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이지요.

본디오 빌라도

유대 땅을 다스렸던 헤롯 아켈라오가 폐위되자 로마제국이 전략적으로 파견한 유대 지방의 총독입니다.

그가 총독으로 재임한 시기가 주후 26년경부터 36년까지이니까 예수님의 사역과 아주 밀접한 시기에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렇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 본디오 빌라도는 그리 호감적인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부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우선 자기 민족을 대표하는 유대 왕국의 분봉 왕 헤롯 아켈라오를 강제로 폐위 시킨 후 파송 받은 로마의 총독이었기 때문이 당시 유대 사람들로부터 적대적인 반감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특히 열혈당원이 지목한 1급 테러의 대상이었지요.

 

이는 유대 지방의 총독으로 파견된 본디오 빌라도도 마찬가지 감정이었습니다.

아무리 총독이라고는 하지만 정치적 민란이 끊이지 않았고, 다른 지방처럼 한 몫 단단히 챙길 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었던 유대 땅에 파견 된 것은 그에게도 그리 매력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유대교와 유대 문화를 아주 멸시했던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인들과 여러 차례 사사건건 충돌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황제의 얼굴이 그려진 깃발을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들여왔다가 예루살렘 주민으로부터 엄청난 저항에 직면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수로 사업에 필요한 건설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 금고에 손을 댔다가 거의 봉기 수준의 저항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처럼 유대인과 본디오 빌라도의 관계는 늘 평행선이었습니다.

 

그런데 늘 적대적이었던 이 둘의 관계가 극적으로 호전되는 역사적 사건이 하나 일어나게 되는데 그 사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하는 일에 이들이 하나가 됩니다.

요한복음 19장입니다.

19:14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9:15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9:16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철천지원수 사이였던 유대인과 본디오 빌라도가 드디어 하나가 된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저는 1915절 대제사장의 말이 지금도 먹먹하게 다가옵니다.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여기서 말하는 대제사장이란 하나님의 집이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그 인생의 전부라도 해도 의심할 수 없는 자가 대제사장입니다.

그에게 유일한 왕이 있다면 여호와 하나님뿐이지요.

 

그런데 그가 뭐라고 본디오 빌라도와 백성들 앞에서 소리칩니까?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진짜 왕이신 하나님 듣는다면 귀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지요.

 

대제사장이 이렇게 까지 무리수를 둔 이유가 있습니다.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를 죽일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912절입니다.

19: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결정적인 증거는 19절 이후입니다.

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19:20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19: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19: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예수를 심판하고 죽이는 일에 있어서 나는 아무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 죄도 없다는 표시이지요. 이처럼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를 죽이는 일에 관여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냐가 아니라 오직 자기 보신 자기 이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교회는 본디오 빌라도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인자로 낙인찍었을까요?

바로 자기 본능과 자기 야망에만 충실했던 교만한 인간.

그 인간의 교만함이 주는 인간의 폐단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도 교만하여 자기 본능과 자기 야망에만 충실하다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인 제 2본디오 빌라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교육이지요.

그래서 사도의 신조(가르침)라고 하는 사도신경 중간에 이렇게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사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을 근심케 하는 교만으로부터 멀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진리를 보셨습니까? 참을 보셨습니까?

그러면 권모술수를 버리고 진리와 가까이 하십시오.

그래야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주는 어리석음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살펴볼 인물은 유다 왕 므낫세입니다.

유대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악한 왕으로 낙인이 찍힌 인물이지요.

하나님이 세운 다윗의 왕조를 멸망시킨 아주 나쁜 왕으로 낙인이 찍힌 인물이 므낫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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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낫세

그의 아버지는 히스기야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15년이라는 생명이 연장되었던 왕이지요.

하지만 바벨론 사신들에게 자신의 부를 자랑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그런 아버지 히스기야가 세상을 떠나자 열두 살 어린 나이에 므낫세가 왕이 됩니다. 그리고 쉰다섯 해 동안 남 왕국 유다를 다스리게 됩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기간이 각각 40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므낫세은 무려 55년간 유다 왕으로 가장 오랫동안 통치하게 됩니다.

 

므낫세

그 이름은 '잊게 하다' 혹은 '잊어버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므낫세

노예로 팔려간 요셉의 맏아들 이름도 므낫세이지요.

요셉이 애굽에서 맏아들을 얻자 지어 준 이름이 므낫세입니다.

비록 타향이지만 하나님이 맏아들 므낫세을 얻게 하심으로 그 동안 겼었던 온갖 슬픔과 서러움 그리고 온갖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드디어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쁨의 표시로 애굽에서 얻은 맏아들의 이름을 므낫세으로 지은 것입니다.

창세기 4151절입니다.

41:51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잊어버리게 하셨다

이것이 므낫세라는 이름의 뜻입니다.

 

그런데 유다 왕 므낫세이 무엇을 잊고 살았는가 하면, 정작 잊지말아야할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를 잊고 살아갑니다.

하기야 열두 살에 왕에 오른 므낫세이 무슨 철학을 가지고 국정운영을 했겠습니까? 위임된 권력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지 므낫세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아버지 히스기야의 개혁 정치, 그 개혁에 눌려 있었던 귀족들과 부유층들의 더러운 욕망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은 히스기야의 개혁 정책 때문에 잃어버렸던 특권을 다시 찾기 위해 어린 므낫세에게 공포를 심어줍니다.

국제 정세가 이렇게 어렵고 국내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데 아버지 히스기야처럼 개혁 정책만 피다가는 너 죽고 나죽고 다 죽을 뿐만 아니라 곧 나라까지 망친다.’는 공포감을 심어줍니다.

 

그래서 어린 왕 므낫세이 돌파구로 찾은 것이 친 앗시리아 정책입니다.

요즈음 표현으로 하면 친 앗시리아라는 핵우산 속으로 들어간 것이지요.

문제는 이 일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고 야훼 하나님의 뜻을 여쭙는 일이 점점 드물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아예 성전으로 가는 발길을 끊습니다.

그리고 상전 국가인 앗 시리아의 눈치만 살피게 됩니다.

 

더 큰 문제는 앗 시리아로부터 들어 온 문화와 종교가 유대민족의 고유 정신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앙까지 좀먹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방 귀족들과 토호세력의 거점이었던 산당을 다시 허락해서 세우게 했고, 백성들에게 널리 펴졌던 민간 신앙 바알의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곳곳에 세우게 됩니다.

종교 포퓰리즘Populism이지요.

 

므낫세의 우상숭배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 스스로 아로새긴 목상을 가져다 놓음으로써 야훼 하나님을 능멸하기 까지 합니다.

예루살렘 옆 힌놈의 아들 골짜기라는 곳이 잇습니다.

게헨나라고도 하는데 거기서 자기 아들들을 몰록 신에게 번제물로 살라 바치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예언자는 사라지고 무당과 점쟁이, 마술사들이 제철을 만난 것처럼 설쳤습니다.

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정의와 공의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열왕기서 기자는 불과 몇 십 년 후에 닥쳐올 유다 멸망의 모든 책임을 오직 한 사람 므낫세에게만 돌립니다.

하나님이 세운 나라 다윗의 왕조를 멸망시킬 만큼.

그만큼 악하고 더러운 왕이 므낫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므낫세를 향한 열왕기서 기자가 내린 평가이자 낙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 악한 므낫세이 몇 년 동안 유대의 왕으로 통치합니까?

무려 55년입니다.

여기서 후대의 사람들이 고민에 빠진 것입니다.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런 못된 놈을 무려 55년이나 유다 왕으로 삼으셨을까?’입니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역사를 다시 쓴 사람들이 바로 오늘 본문이 있는 역대상하를 기록한 역대기 기자들입니다.

그들은 무려 55년 동안 유다의 왕으로 치리했던 므낫세를 못된 왕’ ‘나쁜 왕으로만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적인 관점에서 므낫세를 재평가하게 되는 데 그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55년이라는 므낫세의 장기 통치

거기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비밀하나가 숨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55년 동안 므낫세의 못된 행적을 공의의 하나님이 묵인하고 눈 감아 준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신앙의 비밀이 숨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그가 악한 왕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돌보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왜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언약 때문이고

또 하나는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회개의 기회이지요.

 

므낫세에게 찾아 온 회개의 기회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죄를 꾸짖어도 므낫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자 하나님이 아주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합니다.

앗 시리아를 들어 유다를 치게 해서 므낫세를 결국 쇠사슬에 묶인 채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하십니다.

역대하33장입니다

33:10 여호와께서 므낫세와 그의 백성에게 이르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33:11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지휘관들이 와서 치게 하시매 그들이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간지라

 

그런데 이 때 겪어야 했던 므낫세의 시련이 그에게 저주가 아니라 결국 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교만을 겪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회개의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33:12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33:13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핵심은 12절 끝부분과 13절 앞부분입니다.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

드디어 하나님 무서운 줄 아는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본문의 내용은 열왕기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므낫세이 변화가 된 촉매가 바로 참회의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겸손이 밑바탕이 되는 회개의 기도이지요.

우리 성경에는 없지만 알렉산드리아 성경 사본 시편의 부록에 보면 14개의 찬양이 덧붙여 있습니다. 거기에 므낫세이 드렸던 참회의 기도가 나오는데 그 중에서 일부를 소개하겠습니다.


오 주님,

내가 바다의 모래보다 많은 죄를 저질렀으니 나의 죄가 허다하고, 그 죄가 차고 넘쳐 내가 하늘을 향해 눈을 들 수 없으니 나의 허물이 많습니다.

쇠사슬에 겹겹이 묶여 엎드러지고 내 죄로 인해 억눌려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내가 당신의 노를 발하며 당신 앞에 악을 행하여 가증한 것들을 세우고 죄를 더하였나이다.

이제 마음의 무릎을 꿇고 당신의 선하심을 구하나이다.

주여, 내가 죄를 범하였나이다. 나의 허물을 자백하나이다.

내가 기도하고 당신을 구하나니 나를 풀어주소서, 나를 풀어주소서.

나의 범죄를 따라 나를 멸하지 마옵소서.

언제까지나 노하지 마시고 나의 악함을 쌓아놓지 마소서.

땅의 가장 낮은 곳에 나를 내버려두지 마옵소서.

당신은 주님이시며 회개하는 자의 하나님이시니 당신의 자비를 좇아

내 속에 당신의 선함을 보이소서. 가치 없는 나를 구하소서."

이처럼 므낫세는 참회의 기도만 드린 것이 아닙니다.

겸손해진 므낫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시 나라를 다스릴 때 그는 회개의 합당한 삶과 정책을 피게 됩니다.

오늘 읽지 않았지만 14절부터 17절을 보면 그 내용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33:14 그 후에 다윗 성 밖 기혼 서쪽 골짜기 안에 외성을 쌓되 어문 어귀까지 이르러 오벨을 둘러 매우 높이 쌓고 또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에 군대 지휘관을 두며

첫째, 예루살렘에 외곽 성인 요새를 쌓고 군대 지휘관들을 배치함으로 국방을 든든히 세웁니다.

둘째, 15-16절입니다.

33:15 이방 신들과 여호와의 전의 우상을 제거하며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 산에와 예루살렘에 쌓은 모든 제단들을 다 성 밖에 던지고

33:16 여호와의 제단을 보수하고 화목제와 감사제를 그 제단 위에 드리고 유다를 명령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하매

 

성전 안에 있었던 이방 신상들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져다 놓았던 목상들까지 다 없애고 이교의 제단도 다 철거합니다.

그런 후 그 동안 단절되었던 화목제와 감사제를 다시 드리게 되지요.

물론 이것으로 모든 것이 회복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숙제는 남아 있었습니다.

33:17 백성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만 제사를 드렸으나 아직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더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므낫세이 죄를 떠나 긍정적인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열왕기서의 므낫세은 회생 불가한 천하의 악인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이 속한 역대하에 소개된 므낫세는 한 때 악인이었지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변화된 은총의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사실 어느 쪽이 역사적 사실에 더 부합하는지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역대하를 기록한 기자, 역대기 역사가의 메시지입니다.

첫째, 천하의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역사하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우리가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하의 악인 므낫세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회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둘째, 세상을 향해 죄인이라 낙인찍고 못된 놈이라고 정죄만 하지 말고 고쳐주시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총 앞에 우리 모두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홀로 나아가지 말로 전도해서 죄인들과 함께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셋째, 바울 사도의 말처럼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12:2)하는 새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 하셔야만 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