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로서 산다는 것?
마가복음 3:13-19 2017/09/14 성령강림 후 14주
3: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3: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3:16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3: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3: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3: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늘 우리 가운데 그리고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북한의 6차 핵실험 이후 한반도에 위기 상황이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습니다.
핵보유국의 지위를 보장받고 그리고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김정은 정권은 연일 국제사회가 염려할 만한 무리수를 두고 있습니다.
반면, 이것을 용일할 수 없는 트럼프 정부는 '북한은 곧 화염과 분노'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며 김정은 정권을 연일 자극하고 있습니다.
8월 전쟁설, 9월 9일 전쟁설이 지나갔지만 착잡한 마음 가눌 길이 없습니다.
‘고립과 전쟁을 통한 국제 사회의 심판이냐 아니면 타협과 평화를 모색하는 대화이냐?’
사실 주어진 선택지 속에서 모든 이들이 만족할 만한 정답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도 우왕좌왕하고 있지요.
아마, 문재인정부가 출범한 이후 최대위기라 여겨집니다.
그렇다며 성경은 이 두 가지 선택지 속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을까?
우선 ‘하나님의 율법’에 기록 된 모세의 선택지입니다.
레위기 24장 19-22절입니다.
24:19 사람이 만일 그의 이웃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24:20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24:21 짐승을 죽인 자는 그것을 물어 줄 것이요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일지니
24:22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한 군데 더 찾아보겠습니다.
신명기 19장입니다.
19:18 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19:19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19:20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
19:21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이것으로만 보면 트럼프 정부가 집어 든 그리고 우리나라 보수 성향을 가진 분들이 집어 든 선택지 '북한은 곧 화염과 분노'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해법은 그리 틀린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요.
문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레위기 24장 19-22절과 그리고 신명기 19장18-21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곧 모세의 율법이라는 문자주의에 빠지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우리 주님이 이렇게 재해석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입니다.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레위기 24장 19-22절, 신명기 19장18-21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지말라) (그 대신, 예수님의 해법입니다) ①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5:40 ②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5:41 ③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5:42 ④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⑤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5:43 또 ⑥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다시 반복합니다. 레위기 24장 19-22절, 신명기 19장18-21절,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마지막)⑦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하나님의 긍휼과 지바기 임하기를)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지금 성경에 기록된 두 가지의 선택지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율법에 기록된 모세의 선택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하신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렇게 해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입니다.
자, 우리가 유대인처럼 모세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라면 이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답은 명확하지만 모세의 선택지 속에서 살아가는 분들이 몇 있어서 여러분 각자에게 그 몫을 돌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첨언해서 드리고 싶은 말씀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라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라면,
신앙적인 아무런 고민도 없이 또 신학적인 아무런 질문도 없이 또 인간적인 대화와 노력도 없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문자에 빠질 수 있을까? 라는 부분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특수한 상황이 있습니다.
바로 분단과 휴전입니다.
그래서 ‘대화’라든가 ’포용‘ 그리고 ’평화‘라든가 ’통일‘이 낭만적인 감성쯤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가, 휴전국가에 산다는 아픔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히브리 시인의 염려를 다시 한 번 상기했으면 좋겠습니다.
시편120:6-7절입니다.
120:6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120:7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새 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너무나도 오랫동안,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왔구나.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평화를 말할 때에, 그들은 전쟁을 생각한다.
오늘 여러분과 좀 더 깊게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 주제는 이런 것입니다.
이처럼 ‘증오와 폭력’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입니다.
누구나 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증오와 폭력 그리고 전쟁을 생각하는 시대에 그리스도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을 두고 하는 말일까? 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마가복음 3장입니다.
3: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여기서 우리가 우선 집고 넘어갈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오르신 이유’입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의 경우.
예수님이 산에 오르신 이유를 천국복음 선포라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케리그마(선포)와 디다케(가르침)이지요.
마태복음 5장입니다.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5:2 입을 열어(케리그마) 가르쳐(디다케) 이르시되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반면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산에 오른 이유는 좀 다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가복음 6장12절입니다.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마태복음과 달리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산을 찾는 이유는 기도이지요.
이것이 누가복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변화 산 사건을 기록할 때도 누가복음만 특별히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다고 첨언해서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9장 28절입니다.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하지만 병행절 마17:1, 막9:2에는 기도하러 산에 올라다는 부분이 없음)
이처럼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산에 오늘 이유는 기도입니다.
자, 오늘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이 기록된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산에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예수님이 산에 오르십니까?
‘제자삼음’ 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원하는 이를 제자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마가가 밝힌 예수님이 산에 오른 이유입니다.
그렇게 세워진 제자가 12명입니다.
예수님의 원하심에 따라 부르심을 받고 세우심은 입은 제자 12명입니다.
자, 누구누구인지 한 사람씩 살펴보겠습니다.
3:16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①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3:17 또 ②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③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3:18 또 ④안드레와 ⑤빌립과 ⑥바돌로매(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란 칭찬을 받았던 나다나엘과 동일 인물)와 ⑦(세리)마태(눅, 레위)와 ⑧(유다)도마와 ⑨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⑩다대오(눅,야고보의 아들유다)와 ⑪가나안인(눅, 세롯, 열심당원) 시몬이며
3:19 또 ⑫가룟(이스가리옷)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이처럼 예수님 제자들의 성향을 분석해 보면 그 면면이 참 다양합니다.
우선 주축에 서 있는 제자 그룹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안드레는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분봉 왕 헤롯 안티파스의 비호를 받고 갈릴리 어부로부터 세금 수탈을 강행했던 세리 마태 역시 예수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가해자였던 세리 마태와 피해 당사자였던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 안드레가 함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도저히 섞일 수 없는 두 부류의 인간이 예수님 안에서 제자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된 것이지요.
이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급진적인 테러리스트도 있었습니다.
세롯, 열심당원(열혈당원)에 속한 가나안 인 시몬이 그 주인공이지요.
어떤 이들은 가룟(이스가리옷 출신) 유다도 열혈당원으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가룟(이스가리옷) 이라는 말에 급진적 테러리스트 집단인 ‘시카리단’이라는 말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인데 아직까지 정확하게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그 외에도 빌립, 바돌로매,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그리고 다대오 등 그 면면히 참 다양합니다.
예수님의 12제자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최후의 만찬’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찌에’(Santa Maria delle Grazie) 성당 식당 벽면에 그린 '최후의 만찬'을 보면 그 특징이 제자마다 아주 면면히 잘 나타납니다.
중요한 것은 그림의 중심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림 중심에 누구를 두고 있는가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에게 필요한 제자들이 그 특징에 따라 각각 잘 배치되어 있다는 특징입니다.
성정과 삶의 배경이 서로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이 그림이 주는 힘이자 감동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택한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면모를 보면 정말 별 볼일 없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을 그 중심에 두고 그들 각자의 삶이 이어나갈 때, 하나님의 역사 구원의 역사는 그들을 통하여 늘 새롭게 쓰여 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고린도전서 1:27-28절입니다.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미련한 것들, 세상의 약한 것들, 세상의 천한 것들, 멸시 받는 것들, 없는 것들을 택하사 하나님의 놀라운 일 곧 구원의 역사를 이 땅에 이 세상에 펼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별반 다름없는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로 세워졌을까? 라는 질문입니다.
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자기와 함께 있을 자’를 제자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마가가 제시한 제자의 덕목이자 제자의 자격 조건입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어떻습니까?
‘주님과 함께 있습니까?’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함께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그분의 몸가짐, 그리고 그 분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따라 살아가십니까?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
보냄을 받는, 전도자의 삶을 살 때입니다.
다시 3장 14절인데 후반부입니다.
3: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보낸 이의 뜻을 행하는 전도자의 삶’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람을 대했던 방식입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삶이자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능력이 부여되는 줄 아십니까?
3: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귀신을 내쫓는 권능’ 바로 ‘사랑’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지금 우리는 ‘분노와 폭력’이 일상이 된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마음.
‘긍휼과 사랑’을 다 잃어버리고 악한 귀신에 사로잡혀 ‘분노와 폭력’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누가 이 귀신들인 세상을 멈추게 하고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둘째,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방식대로 전도자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귀신을 내쫓는 권능’ 그 권능에 사로잡힌 주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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