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의 산상설교 11
마태복음 7장 13-14절 2017/05/17(수)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전한 복음의 핵심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산상설교의 배경이 되는 말씀, 마태복음 4장 17절에 나옵니다.
마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첫째, ‘회개하라’입니다.
원어 그대로 풀이하면 ‘돌아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디로부터 돌아서야할까요?
‘흑암의 자리’ 그리고 ‘사망의 땅’에서 돌아서라 것입니다.
이사야 9장 1-2절 말씀인데,
9: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이것을 마태는 4장 15-16절에서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4: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같은 본문인데 번역이 동일하지 않지요?
그 이유는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가 ‘히브리어 성경’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 즉 ‘칠십인역 성경(셉투아진트, Septuagint)’을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칠인역은 예수님 시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인용되었던 성경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전한 복음의 핵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 바로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들이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인 ‘안드레’ 그리고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예수님의 제자가 12명이 되고, 12명은 다시 70명의 제자가 됩니다. 70명의 제자는 다시 120명의 제자가 되고 성령 강림 후에는 숫자를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6장 7절입니다.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여기서 말한 ‘이 도’란?
그리스도가 전한 복음으로 두 가지를 말합니다.
다시 정리하면,
첫째, ‘흑암이 앉은 자리’ 즉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리’로부터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 바로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 속에 여러분과 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쳐 놓은 장애물에 걸려 넘어져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 장애물들을 기록한 말씀이 마태복음 7장입니다.
‘천국 가는 길의 장애물’, 몇 가지가 있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까?
크게 3가지입니다.
첫째, 7장 1-11절에 나오는 내용으로 ‘비판하는 마음’입니다.
자기 눈에 죄와 어둠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죄와 어둠의 티만 보는 것이지요.
이것은 나의 내면으로부터 오는 장애물로 천국 가는 길의 가장 큰 장애물이자 가장 강력한 장애물이라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천국 가는 길에서 이 거대한 장애물을 어떻게 거두어 내야할까요?
마태복음 7장 12절에 나오는 ‘황금률’을 통해서입니다.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것을 바울은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경쟁심,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그래야 자기 눈에 죄와 어둠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죄와 어둠의 티만 보는 비판의 마음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장애물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장애물로 ‘세상의 유혹’입니다.
첫 번째 장애물과 달리 그리고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로부터 오는 장애물이지요.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여기에 보면 서로 다른 두 개의 문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13절,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두 번째는요?
14절,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면 어느 문으로 들어가야 할까요?
정답은 분명하고 명확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14절,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13절,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첫째는 그 문이 크고, 둘째는 그 길이 넓으며, 그리고 셋째는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유혹당할 만한 아주 매력적인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먹음직도 하고 보함직도 한 선악과처럼 유혹당할 만한 아주 매력적인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웨슬리 목사님은 자신의 설교에서 이 문을 ‘지옥으로 가는 문’이라고 확정하면서 ‘죄와 악’을 나누십니다.
죄란 무엇인가?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그 문이 엄청 ‘크다’는 것입니다.
엄청 클 뿐만 아니라 그 문의 한계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죄가 그 문으로 들어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주신 계명들을 수행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특히 황금률인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율법과 선지자의 본뜻을 실천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죄로 말미암은 ‘악한 행실들’입니다.
하나님과 적대적인 관계를 가진 자만이 행할 수 있는 악한 행실들을 양심의 꺼리지 않고 자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웨슬리 목사님은 이 ‘악한 행실’을 ‘멸망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표현했는데 크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 정욕의 길입니다.
둘째, 자만심의 길입니다.
셋째, 아집의 길입니다.
넷째, 세상을 사랑하는 길인데 그 길의 폭이 넓어서 그 악한 행실을 하고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저 대수롭지 않은 나쁜 습관이나 관습쯤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 그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많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인 줄 알면서 그냥 ‘떠밀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문제가 어려운 것은 우리에게 좋지 못한 본을 보여 주는 이들 즉 난폭하고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 이 일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의 바르고 교양 있고 신사적이고 품위가 있으며, 이성적이고 학식이 많은 사람들이 더 여기에 앞장선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반면, 작은 문 그리고 좁은 길로 들어간다는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아주 불쾌하고 볼 품 없으며 비참한 길입니다.
하지만 그 문과 그 길이 우리의 문 우리의 길이 되어야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인자’로 여길 수 있는 세 가지 예언의 사인이 있습니다.
첫째는 나사렛(나실) 사람
둘째는 나귀 새끼
셋째는 나무 십자가입니다.
어느 것 하나 볼품 있는 것이 하나도 없지요.
세상이 볼 때 어느 것 하나 유쾌하고 볼 품 있으며 참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이 ‘인자’를 의미하는 예언의 사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바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사렛 사람처럼 거룩의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레위기 19장 2절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두 번째로 나귀 새끼처럼 겸손의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세 번째, 나무 십자가처럼 죽음의 문(자기 부인의 삶)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그래서 사도행전 3장 6절에서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
그가 바로 생명으로 인도 하는 유일한 문이자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문이 작고 그 길이 좁아서 찾는 자가 적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심이 팔복에서 이렇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
내 이름을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난의 길
애통의 길
온유의 길
의에 굶주린 길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 박해를 받는 길은 좁고 험하기 때문입니다.
자비의 길
사랑의 길
그리고 거짓 없는 참된 길은
늘 좁고 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찾는 자가 적지요
.
하지만 분명 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 길이 유일한 생명의 길이라는 것이지요.
*대만의 젊은 목회자가 강화를 찾은 이유
말씀을 마칩니다.
웨슬리 목사님이 이 설교를 통하여 강조하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주님의 때가 가까이 왔다는 ‘파루시아(강림)의 신앙’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이 항상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때가 오기 전에, 생명으로 가는 그 문과 그 길이 닫히게 전에 힘써 믿고 힘써 일하라는 것입니다.
찬송가 330장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을 가진 분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죄 사함으로부터 자유’ 구원의 시작이지요.
이것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동의하고 믿음을 가집니다.
하지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임하는 의의 최후 승리로서의 구원’ 그 구원의 마침에 대해서는 강조하는 이들이 드물지요.
왜요?
초대교회가 가졌던 ‘마라나타’와 ‘파루시아’의 신앙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 나라가 아닌 예배당 중심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가 아닌 교권을 가진 사람 중심의 교회가 되고 만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교회의 패악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웨슬리 목사님이 이 설교를 통하여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대세’가 아닌 ‘역류’의 신앙입니다.
사회가 추구하는 의는 대세이지요.
대세가 의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추구하는 의는 ‘대세’가 아닌 ‘역류’입니다.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역류’ 십자가의 신앙이지요.
그러니 좁은 길을 기뻐하십시오.
부유한 심령을 경계하고 가난한 심령을 기뻐하십시오.
세상의 인기를 경계하고 거룩한 고독을 기뻐하십시오.
세상의 칭찬과 위안을 경계하고 하나님이 에비하신 안식을 기뻐하십시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시고 선을 행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침내 하늘 가늘 길이 환하게 우리 앞에서 열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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