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베드로전서 1:17-23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心貧者 2017. 5. 10. 11:07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베드로전서 1:17-232017/05/07(부활절 제4)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1: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1: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계명을 보면 부모와 관련된 계명이 하나 나옵니다.

몇 번째 계명에 나옵니까?

대신계명과 대인계명을 잇는 중간인 다섯 번째 계명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2012절입니다.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부모를 공경하라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일일까요?

여러 가지의 방법과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우선 매일 안부를 묻고 좋은 옷과 좋은 음식으로 대접하는 일이 있겠지요.

또 부모에게 걱정과 근심을 끼쳐드리지 않는 것도 부모를 공경하는 일일 것입니다.

또 좋은 말벗이 되어드리는 것도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우리 하나님이 이 계명을 주신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를 함부로 대하는우리의 어리석음 우리의 교만 때문입니다.

늙었다고 힘이 없다고 경제적 능력이 사라졌다고 부모를 함부로 대하는 우리의 못된 행실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부모 공경을 계명으로 남기셔야만 했을까?

그것은 생명의 전달자로서 부모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전달자로서 그 책임과 역할을 다했다면 아무리 못난 부모라 할지라도 하나님처럼 공경 받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네 부모를 함부로 대함으로 생명의 원 주인이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전달자이신 부모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곧 생명의 원 주인이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대신계명과 대인계명을 잇는 중간 다섯 번째 계명에서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어린 딸 셋을 둔 청상과부가 있었습니다.

이 분의 성격이 얼마나 호탕하고 좋았던지 남녀 간에 거침이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음주가무까지 좋아하니 늘 주의에 남자가 꼬였지요.

그렇게 어린 딸 셋을 친정집에 맡기고 한 동네 안에서 시집을 몇 번 갔습니다.

나중에는 그것도 모자라 옆 동네에서 또 몇 번 갔지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집가서 자녀를 낳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딸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엄마지만 용서가 되지 않겠지요.

그런데요.

그 딸들이 자라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엄마 나이쯤 되자 늙은 엄마를 향해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엄마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하지 마. 엄마 딸들 다 잘 컸잖아. 또 시집가고 싶으면 얘기 해. 내가 근사한 아빠 하나 구해줄게? 우리 셋 건강하게 낳아 준 것 만으로도 엄마는 충분해

 

여러분, 엄마로부터 버림을 당한 이 딸들에게 왜 상처가 없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이 잊지 않고 기억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생명의 전달자로서의 엄마입니다.

나를 품었다가 낳으신 엄마이지요.

그 한 가지 만으로도 부모는 충분히 공경 받을 만 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베드로 사도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 합니다.
예수님의 든든한 제자이자 첫 번째 신앙 고백자이지요.

 

하루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지방에 이르렀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가이사랴 빌립보에서만 할 수 있는 다소 의도적인 질문을 제자들에게 던지십니다.

마태복음 16장입니다.

16: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6: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6: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자 제자 중에서 유일하게 주님이 원하는 신앙고백을 드린 분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베드로입니다.

그가 고백한 신앙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마태복음 1616절입니다.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주님이요 그리스도시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엄청난 신앙 고백이지요.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가장 위험한 고백이기도 한 것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입니다.

특히, 이런 고백을 가장 못마당하게 여긴 사람들이 있었는데 로마 제국주의자들 그리고 유대인의 종교지도자들인 사두개파와 바리새인들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베드로의 신앙 고백, 그 고백의 의미를 제대로 곱씹기 위해서는 이 고백에 장소 가이사랴 빌립보지방에 대해서 우리가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나라 땅을 백두에서 한라까지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로 자신의 영토를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북쪽 끝이 이고 최남단이 브엘세바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최북단 옆에 있었습니다.

 

가이샤라 빌립보는 아주 풍요로운 땅입니다.

건기에도 멈추지 않은 바니아스 폭포가 있어서 숲이 아주 우겨졌고, 만년설이 녹아 땅 속에 들어간 물이 다시 샘솟는 큰 샘이 지금까지도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물이 모자란 이스라엘 지역에서 보기 드물게 적절한 강우량, 풍성한 샘, 그리고 좋은 토질 등 살기 좋은 지역의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 가이샤라 빌립보입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가장 풍요로운 곳이지요.

 

그런데요.

중부지방에서 가장 토질이 좋기로 유명한 땅이자 경기미의 본산인 평택을 미국기지로 그냥 무상으로 내 준 것처럼 유대 왕은 헤롯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위해 판신(사람 상반신에 염소 몸을 한 목축신)신전을 이곳에 건립하게 됩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정치적 야망이 가득했던 헤롯은 판 신전바로 옆에 로마 황제 즉 가이사랴숭배를 위한 신전도 지어 받쳤습니다.

그래서 유대 왕 헤롯이 로마 황제에게 드리는 헌정의 의미로 도시 이름을 아예 가이사랴’(로마 황제)라고 지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흔히 헤롯대왕이라고 부르는 유대 왕 헤롯이 죽고 그의 아들 헤롯 빌립이 분봉 왕으로 이곳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그 때 헤롯 빌립은 자기 이름 빌립을 이 도시 이름에 덧붙입니다.

그래서 탄생한 이름이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현재는 바니아스라고 부릅니다.

판 신전이 있었다고 해서 현재 지명은 바니아스입니다.

그러니까 가이샤라 빌립보는 두 가지의 힘을 상징하는 도시입니다.

하나는 풍요의 힘입니다.

풍부한 물 때문에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 환경 때문에 아쉬울 것 없이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땅이 가이샤라 빌립보이지요.

또 하나는 로마황제와 유대왕가의 권력, 즉 정치적 힘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힘을 모두 강력하게 그리고 전면으로 거부한 신앙 고백이 바로 예수님을 향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입니다.

 

첫째, 주는 그리스도입니다.

무엇을 거부하는 신앙 고백입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세상 권력을 좇아가서 엎드린다 해도 나 베드로는 오직 예수님만을 나의 주인으로, 나의 구원자 즉 그리스도로 고백하겠다는 천명입니다.

 

둘째,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무엇을 거부하는 신앙 고백입니까?

세상의 우상을 전면으로 거부하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왜요?

그것은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닌 죽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만을 나의 주인으로, 나의 구원자로 모시고 살겠다는 천명입니다.

 

어떻습니까?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수제자가 될 만한 자격이 충분하지요.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은 가장 위험한 고백이기도 했었습니다.

왜요?

자기 목숨을 내 놓아야만 할 수 있는 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고백 때문에 베드로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주 처참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만큼 위험한 고백이지요.

 

그런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이런 권면을 합니다.

첫째, 베드로 전서 117절입니다.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나그네로 있을 때에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우리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그네의 삶을 마치고 천국 본향 곧 아버지 집에 들어가지 전 까지는 매일 매일 두려움으로 지내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이런 베드로 사도의 권면을 무색하게 하는 분들이 교회 안에 종종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실한 형제들이 근심하는 것도 모르고 제 멋대로 행동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쉬움이 없는 세상의 환경을 쫒아 가고 세상의 힘과 권력을 따라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광야교회를 살아가는 나그네인데도 자꾸 거짓 안식, 헛된 생활 방식에 안주하려 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도는 그런 우리에게 애정 어린 마음을 담아 권면합니다.

거짓 안식’ ‘헛된 생활방식에서 벗어나 다시 그리스도의 보혈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다시 보혈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 권면, 22절입니다.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이왕 사랑할 것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3가지의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마음으로입니다.

가식이 아닙니다.

형식이 아닙니다.

꾸밈없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입니다.

 

둘째, 뜨겁게입니다.

냉냉한 사랑이 아닙니다.

차가운 사랑이 아닙니다.

뜨겁게, 아주 열정적으로 '변함없이' '깊게'하는 사랑입니다.

 

마지막 셋째, 서로 함께하는 사랑입니다.

일방적인 외톨이 사랑이 아니라 서로 서로 함께하는 순결한 사랑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지금 우리는 사랑이 왜곡된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이 사랑의 가치를 대신하고 있지요.

이 비참한 현실을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할까요?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즉 보혈로입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서 핏방울을 땀방울처럼 흘리는 헌신과 희생입니다.

 

둘째, 꾸밈없는 마음으로, 변함없이 뜨겁게, 서로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성경은 이 부분을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라고 간결하게 번역해 놓았는데 참 좋은 번역이지요.

서로 한결같이입니다.

마지막으로 메시지 성경은 베드로전서 122절을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거기에 달려 있다는 듯이 사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