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호세아 1:1-4 공의와 사랑

心貧者 2016. 9. 24. 14:06


공의와 사랑

호세아 1:1-42016/9/23()

1:1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1:2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1:3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1:4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구약시대에 활동했던 하나님의 선지자 중에 호세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원래 발음은 호세아으이지요.

그가 건지신다.’ ‘그가 도우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19절을 보시기바랍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여기에 보면 호세아와 관련된 단어를 하나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세요?

그렇습니다.

호산나입니다.

호산나’ ‘호세아의 발음이 비슷하지요.

왜냐, 그 어원이 같기 때문입니다.

호세아가 그가 건지신다. 그가 도우신다.’라는 선포의 뜻을 가지고 있다면 호산나는 우리를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청원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호산나 그러면 선지자 호세아를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호세아서 읽어 보셨나요?

호세아서를 읽어보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이 아주 교묘하게 갈등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할 때 그 입니다.

하나님의 는 성경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정의이고 또 하나는 공의입니다.

 

우선 정의입니다.

정의, 새 번역성경은 '선한 일'이라 번역해 놓았는데 히브리어로 미슈팟(mishpat)’이라고 합니다.

재판관이 오직 법에 따라 판결하는 사법적 정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반면, 공의라는 말은 새 번역 성경에서 이것을 '옳은 일'이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히브리어로 쩨다카(tzedakah)’라고 합니다.

그 뜻은 미슈팟(mishpat)’ 곧 사법적 정의를 통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바로잡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공의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종종 공의를 회복된 정의라고도 번역하는 것입니다.

공의 속에 정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공의여기에는 피와 눈물이라는 감정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율법의 잣대뿐입니다.

그래서 상당히 이성적이고 상당히 냉철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마음은 정 반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긍휼과 사랑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율법의 잣대로는 심판 받을 마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 곧 십자가의 사랑으로 인해 구원에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은 아주 교묘하게 서로 갈등구조를 이루고 있는 데 이것이 가장 잘 나타난 본문이 바로 호세아서입니다.

 

사실 공의와 사랑은 함께 공존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말하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문제가 되고,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공의를 말하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늘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수들의 불의함을 대할 때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잣대로 됩니다. 하지만 나 자신의 불의함을 대할 때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잣대로 됩니다.

공평하지 않지요.

이것이 인간이고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이미 우리 안에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늘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노도 있고 용서도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도 있고 구원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증명한 책이 바로 호세아입니다.

호세아는 남 왕국 유대와 북 왕국 이스라엘이 분열 될 당시, 북 왕국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러니까 북 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이지요.

그가 북 왕국 이스라엘을 향하여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겠다는 것과 그리고 둘째,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세우겠다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구약을 어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인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고, 하나님의 사랑인가 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서로 아울리기 어려울 것 같은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서 아주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고, 아주 훌륭한 조화(하모니)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주 명쾌하게 증명한 책이 호세아입니다.

 

우선 하나님은 자신이 세우고자 하는 공의를 위해 북 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범죄를 아주 적나라하게 고발합니다.

호세아 11-2절입니다.

1:1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1:2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지금 북 이스라엘이 범한 죄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말씀이 2절 후반부에 나옵니다.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이스라엘의 죄악을 음란이라는 한 단어로 하나님이 정의하십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자신의 음란을 인정하지 않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아주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호세아 통하여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게 하시고 그리고 그로부터 음란한 자식들을 낳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죄악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너희들의 현실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건지신다.’ ‘그가 도우신다.’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사람이 호세아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름을 가진 하나님의 선지자가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고 음란한 자식들을 낳는다.

사실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까지 하신 이유는 늘 범죄가 일상이 된 이스라엘 백성과 이제는 끝장, 곧 결판을 내고 싶은 하나님의 마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지 막, 이라는 뜻을 가진 고멜을 선지자의 아내로 맞이하게 한 것입니다. 고멜의 이름처럼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이스라엘과 끝장, 단판을 보겠다는 하나님의 결심이 이 사건 속에 담겨진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그의 자녀들의 이름으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자녀의 이름을 아버지 호세아가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두 지어주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 이름 속에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3-9절입니다.

1:3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1:4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1:5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1:6 고멜이 또 임신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1:7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8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자녀 셋을 차례로 보게 되는데 첫째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입니다.

이스르엘은 북 이스라엘 평원지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우상숭배에 앞장섰던 아합과 그의 아들들이 죽임 당한 심판의 장소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합 왕의 최후처럼 이스라엘의 처참한 멸망이 눈앞에 다가 왔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태어난 딸의 이름은 루하마입니다.

긍휼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 조금도 긍휼을 베풀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진 이름입니다.

 

셋째, 역시 심판과 관련된 이름인데 셋째 아들의 이름은 암미입니다.

암미(백성), (부정관사 아니다)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너희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 이상하십니다.

이 심판과 함께 돌이킬 기회를 다시 한 번 이스라엘에게 제공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공의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길을 하나 가르쳐 주시는데 그 길이 6장에 나옵니다.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6: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6: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은 항상 두 가지의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공의의 하나님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지금 공의의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그러면 그 하나님 앞에서 나아가 죄를 시인하십시오.

그리고 인애하신 구세주 앞에 엎드리십시오.

 

혹 사랑의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까?

그러면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감사하시고 기뻐하시고 그리고 찬양하십시오.

우리 안에 하나님의 공의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늘 함께 거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