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총명
야고보서 3:13-18절 2016/9/21(수)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3: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3: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주제는 지혜와 총명입니다.
지혜, 다른 말로는 ‘분별력’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한 분별력, 무엇에 대한 지혜를 우리가 가져야 할까요?
‘참과 거짓’을 가리는 능력이 분별력인데, 우리 성경에는 크게 3가지가 나옵니다.
1)‘참 하나님이 누구인가?’
이러면 이렇게 반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거짓 하나님도 있나? 그리고 설사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구 별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나?’ 이렇게 삐딱하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거짓 하나님, 있나요 없나요?
있지요.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하ㄴ의 교회, 신ㅊ지장ㅁ성전)
그러면 무엇을 기준으로 ‘참 하나님이다 거짓 하나님이다.’를 분별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성경이고 둘째는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무감지 무의지 무의식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영이신 하나님입니다.
그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는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특단의 조치가 내려진 것이 육체를 입은 우리가 인식가능 하도록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말씀’으로 계시한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첫째는 모세를 통한 언약의 말씀, 구약이지요.
둘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독생 하신 하나님, 바로 예수 그리스도, 신약입니다.
구약과 신약, 이 성경을 가지고 우리가 잣대를 삼아 분별할 수 있는 것인데 여기에는 반드시 전재되어야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성령의 조명(인도하심)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오신 거룩하신 분의 영,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분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분별력을 기초로 해서 미약하고 미숙한 성도들 즉 거짓의 유혹 받기 쉬운 연약한 성도들에게 교육과 학습이 가능하도록 정리한 것이 바로 신학이 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한국교회가 이단이나 동성애 문제 그리고 이슬람 문제에 있어서 맥을 추지 못하는가?
신학의 부재이지요.
분별력의 잣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되 반드시 성령의 조명(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좀 원색적으로 표현하면, 무릎 꿇고 성경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어떤 분별력을 가져야 하는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무엇인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정의와 공의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 찾는 것이 긍휼과 자비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틀어 우리가 ‘구원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살아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3) 우리가 또 어떤 분별력을 가져야 하는가?
참되신 하나님 그리고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했다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분별해야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진실하게 그리고 책임 있게 전하는 참된 일군(참된 선지자)은 누구인가? 에 대한 분별력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지혜란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인데 3가지입니다.
1)참 하나님이 누구인가?
2)참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3)참된 일군(참된 사도 참된 선지자)은 누구인가?
이 모든 것을 총정리 한 말씀이 잠언 9장 10절입니다.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그것이 분별력이고 지혜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살펴볼 단어가 총명이라는 말입니다.
지혜와 총명, 비슷비슷하지요.
하지만 그 뜻은 전혀 다릅니다.
지혜가 정적인 이미지라면 총명은 동적인 이지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 번역 성경은 총명을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이해력이 있는’
다른 말로 하면 ‘실천할 수 있는 지식’ 입니다.
지혜가 분별력이라면 총명은 그 분별력을 바탕으로 실천할 수 있는 실제적인 지식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뜻합니다.
하나님과 만남이 지혜(서로 마주친 손바닥)라면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이 바로 총명(서로 깍지를 낀 상태의 손바닥)입니다.
그래서 잠 9:10 절 후반부에서 총명을 이렇게 정의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동사 ’야다‘, 동침하다. 요한복음 15장 표도나무 비유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는 상태’) 것이 명철(총명)이니라’
그런데 야고보가 볼 때 지금 심각한 문제가 교회 공동체 안에 발생한 것입니다.
당연히 있어야할 성령의 열매로서의 지혜와 총명을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질문입니다.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렇다면 왜 야고보는 다소 격양된 어조로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한 시기와 다툼 때문입니다.
3:14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독한 시기와 다툼
이것은 어느 공동체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시기와 다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신앙의 자랑’이 목적이 되는 그래서 신앙의 공동체에 해악을 끼칠 수밖에 없는 시기와 다툼(경쟁심)을 말합니다.
야고보가 목회 할 당시 교회 공동체를 위협하는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유대 그리스도인 중에서 특히 율법에 대한 열심히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세의 율법’이 몸에 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신앙의 자랑을 ‘몸의 할례’와 ‘율법이 정한 정결한 음식’ 그리고 ‘율법이 정한 거룩한 날’을 지키는 것으로 삼았습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에 아주 낯설어하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의 무식쟁이로 그리고 신앙의 무식쟁이로 까지 치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기와 다툼(경쟁심)이 날 수 밖에 없지요.
반면 이방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헬라철학의 사고를 밑바탕 삼아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근하려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율법도 끝났고 구약도 끝났다 오직 로고스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단정 짓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시기가 다툼으로 번지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야고보가 말합니다.
3:14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첫째 자랑하지 말라
둘째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진리 이신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기와 다툼 허용하지 않지요.
그러면서 야고보는 지혜와 총명으로 말미암은 유익 3가지를 제시하면서 건강교회 공동체의 방향을 제시하게 됩니다.
첫째. 지혜와 총명은 우리에게 온유함을 준다는 것입니다.
시기와 다툼을 잠재우는 온유함을 준다는 것입니다.
다시 13절입니다.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누가 진정한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인가?
말 잘하고 언변이 좋은 사람인가?
아니지요.
그럼 누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인가?
선행 즉 착한 행실로 온유함을 드러내는 사람이 진정한 지혜 진정한 총명을 소유한자라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남들보다 인상이 좀 좋고 언변이 수려하다고 해서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선행, 곧 착한 행실을 보이는 사람만이 그 온유함으로 참된 지혜와 총명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하나로 등장하는 것이 온유인데 ‘온유’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입니까?
모세입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라는 사람을 이렇게 하나님이 평가합니다.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이 온유함의 리더십, 그 지혜로 모세는 불가능에 가까운 출애굽의 역사를 성공적로 이끌어 내게 됩니다.
모세의 지혜와 총명 그리고 그의 리더십은 바로 이 온유함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모세는 사실 온유함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한 성질 했던 사람이지요.
자기 성질에 못 이겨 일어나 대표적인 사건 3가지가 있습니다.
1) 애굽 병사를 죽인 사건
2) 첫 번째 받은 십계명의 두 돌 판을 내 던져 깨뜨린 사건
3) 백성과 다투고 므리바에서 지팡이를 내리친 사건
결국 이것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를 알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유함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함과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온유함의 뜻이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온유(溫柔)함이란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온유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의미합니다.
원어의 뜻은 야생마가 주인의 손에 의해 길들여진 상태가 바로 온유입니다.
그런 점에서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한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아무 것도 의지할 수 없는 곳에서 오직 하나님의 손에서만 40년 동안 길들여졌으니, 온유 그러면 모세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지혜와 총명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야생마가 주인의 손에 길들어져 준마가 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 길들여지면 지혜의 온유함과 총명의 온유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둘째, 지혜와 총명은 자비롭다는 것입니다.
3: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야고보는 말합니다.
자기 자랑을 위한 지혜는 진리를 거스를 뿐만 아니라 시기와 다툼의 온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지혜는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수밖에 없습니다.
시기와 다툼을 야기하고 혼란을 야기하고 악한 일을 야기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위로부터 내려오는 자비의 지혜와 총명은 이 모든 것을 성결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마지막 세 번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지혜와 총명은 우리에게 화평을 준다는 것입니다.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3: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화평, 샬롬이지요.
샬롬, 화평이 이루어지면 덩달아서 관용(친절하게 되고), 양순(온순하게 되고), 그리고 긍휼(자비하게 되고), 의의 열매(선한 열매)가 풍성하게 될 뿐만 아니라 신앙 공동체 속에서도 할례파라든지 헬라파라든지 하는 편견과 위선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마태복음 5: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자 누구라고 말합니까?
화평하게 하는 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총명으로 어디를 가든지 그리고 어디를 머물든지 그리고 어디를 떠나든지 자기 자랑의 시기와 다툼을 멀리하고 그 누구와도 화평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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