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가 되라
고린도전서 3:18-20절 2016/9/9(금)
3: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3: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3: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사도행전 2장 1절을 찾아보겠습니다.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2: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방금 읽은 이 사건을 우리는 오순절에 임한 성령강림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카도쉬’, 거룩하신 분의 영, 곧 성령 하나님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이 땅에 처음으로 세워지고 그리고 이 땅에 세워진 교회가 처음으로 하늘로부터 공인 받은 날이 바로 오순절(맥추절)에 임한 성령강림사건입니다.
교회의 생일이지요.
이 때 부터 그리스도교라는 교회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성령 강림’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절기 중에 최고의 절기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직계제자가 아닙니다.
사도직에 대한 자격에 있어서 충분히 의심받을 만한 분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모든 교회가 그를 사도로 의심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 강림입니다.
강림하신 성령이 바울을 사도로 보증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사도가 될 수 잇는 이유?
바로 성령강림입니다.
성령강림.
마땅히 하늘에 계셔야할 ‘카도쉬’ 거룩하신 분의 영이 이 땅에 그리 안에 내려왔다는 이 기이한 체험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회복하는 나라를 기다리는 이들 특히 유대인들에게 강력한 회심을 주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의 역사 곧 죽음의 역사와의 단절이었고 이전의 질서 곧 유대교와 다른 삶의 길을 걷겠다는 새로운 결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전과 다른 그 길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십자가의 길이고 그리고 두 번째는 부활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 부활의 길, 두 길이지만 사실은 한 길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의 길을 통하지 않고는 부활의 길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그 첫 번째 길인 십자가의 길을 쫒아 걷는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의 길, 그 길은 죽음의 문턱까지 들어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자기 목숨을 내어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런 마음가짐을 남겨 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입니다.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여기서 저는 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봅니다.
첫째, 나 자신, 나라는 존재 그 자체를 정말 부인할 수 있을까?
다 제 입맛대로, 제 멋대로, 제 맘대로 살아가는데...
정말 그 반대의 길을 걷을 수 있을까?
사람들은 자기 지혜만 믿고 오늘 본문 말씀 19절 말씀처럼 자기 꾀에 빠져 살아가는데 정말 그 반대의 삶이 가능한가?
둘째, 자기 부인이라는 제 십자가를 정말 질 수 있을까?
그리고 셋째, 포도청보다도 무섭다는 것이 사람의 목구멍인데 정말 자기 목숨을 구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척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목회의 길을 걷고 있지만 종종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길 위에서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런 저에게 주신 말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3: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무슨 말입니까?
첫째, 내 자신의 어리석음을 하나님 앞에서(코람 데오)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못 믿을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속이지 말로 내 자신의 어리석음을 하나님 앞에서(코람 데오) 스스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그렇게 해서 항상 어리석은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누구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자입니다.
오해 하지 마십시오.
세상 앞에서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세상 앞에서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데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여기 우리가 주의해서 읽어야할 단어 하나가 나옵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어리석다’고 번역된 헬라어 형용사 ‘모로스moros’입니다.
형용사 ‘모로스’는 ‘부적절한 행동이나 생각 그리고 부적절한 말’을 지적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이 되라는 말을 자칫 잘못하면 문자 그대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제멋대로 처신하는 멍청한 사람이 되라는 말로 오독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사용된 형용사 ‘모로스moros’의 뜻은 그런 일반적인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 단어를 항상 ‘십자가’와 관련시켜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3절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모로스, 어리석은) 것이로되
고린도전서 1장 25절
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여기서 말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이지요.
자기부인이라는 제 목숨을 구하지 않는 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3장 18절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싶은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라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십자가의 길을 피동적이거나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말 그대로 제 십자가로 여기고 지는 것입니다.
재물을 좀 손해를 보고, 육신이 좀 피곤해도, 자기가 진 십자가의 길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입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하나님의 능력. 정말 믿어지십니까?
그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데요.
오늘 우리가 이 능동적인 어리석음을 자꾸 잃어가고 있습니다.
점점 제 십자가로 여기려 하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약아졌고, 재는 것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절대로 손해 보는 일은 하려 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주보의 표지를 보면 예배 안내가 나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도의 의무 생활입니다.
마땅히 지어야할 내 예배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지나치게 약아져서 그런지 골라서 드립니다.
골라서 예배드리고 골라서 기도회 참석하고 골라서 속회에 참여합니다.
능동적으로 예배의 십자가 기도회의 십자가 속회의 십자가를 지려하지 않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어쩌다 한 번 빠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와 기도회와 속회를 제 십자가로 여기려 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개인 마다 이유가 있고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왜 없겠습니까?
저는 충분이 이해합니다.
문제는 하나님도 이해하실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어리석다’는 뜻의 ‘모로스moros’는 ‘정상이 아니다’는 뜻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을 반추해 볼 때 오늘 우리는 지나치게 정상적이고 지나치게 똑똑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세대의 풍습을 이 세대의 가치를 아무 꺼리김없이 따라갑니다. 그러니 경건의 모양만 있지 경건의 능력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열熱(뜨거움)만 있지 자기 몸을 불사르는 빛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과연 이 땅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누가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릴 수 있는 사람인가?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능동적으로 붙드는 겸허함’
그 겸허함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든 것의 기본이 되는 예배생활 만큼은 지금처럼 좀 어리석은 자, 바보가 되십시오.
예배 생활 기도생활 만큼은 정상이 아닌 자가 되십시오.
그래서 예배를 통하여 그리고 기도회를 통하여 그리고 속회를 통하여 주시는 하늘의 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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