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 있는 믿음이란 긍휼입니다.
야고보서2장 13-26절 2016/8/24(수)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한 십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중에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전도연씨가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더욱 주목을 받게 된 영화인데 한번쯤 꼭 보셨으면 합니다.
‘밀양’ 한자로는 빽빽할 밀(密), 볕 양(陽)자를 쓰고 있습니다.
풀어쓰면 빽빽할 햇볕, 촘촘하고 빈틈없이 내리쬐는 햇볕을 뜻합니다.
이름 참 좋지요.
그런데 ‘밀양’이라는 영화의 영어 제목은 더 좋습니다.
‘Secret Sunshine’입니다.
번역하면 ‘감추어진 빛, 은밀한 빛’이 됩니다.
무엇인가 있어 보이지요?
왜 이렇게 번역을 했을까요?
그것은 ‘밀’ 자가 가지고 있는 이중적 이미지 때문입니다.
‘밀’이라는 한자는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빽빽하다, 촘촘하다, 빈틈이 없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밀봉’, ’정밀’이라는 말이 그 대표적인 용례입니다.
또 하나는 ‘은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밀’이라고 말할 때 ‘밀’이 ‘은밀하다’를 뜻합니다.
빽빽하고 촘촘하고 빈틈이 없으면서도 감추어진 은밀한 상태.
이것이 ‘밀’자가 가지고 있는 이중적 의미인데 뒤에 나오는 ‘볕 양’자와 그 이미지가 아주 잘 어울립니다.
빛, 역시 이중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빽빽하고 촘촘하고 빈틈이 없으면서도, 부소부재지요, 그러면서 동시에 은밀하게 감추어진, 이것이 빛의 이중적 이미지인데 ‘밀양’이라는 단어 속에 소스란히 담겨져 잇습니다.
영화를 만든 이창동 감독은 그리스도교의 핵심 가치요 중심 사상인 ‘하나님의 은총’을 이 ‘밀양’이라는 단어를 통해 설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밀양’이라는 영화의 제목답게 , 밀양시가 영화의 주 무대가 됩니다.
밀양시, 경상북도 입니까, 경상남도 입니까?
경상남도입니다.
지방의 아주 작은 소도시입니다.
좀처럼 사람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역시 이중적 이미지지요. 이처럼 아주 평범한 도시가 바로 밀양시입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서울에서 살던 ‘신애’라는 주인공은 사랑하는 남편을 잃게 됩니다.
그러자 하나뿐인 아들 ‘준’을 데리고 남편이 늘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던 남편의 고향, 밀양에 정착하여 살게 됩니다.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존재를 아무도 모르는 밀양에서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조그마한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면서 모든 희망을 아들 준이에게 둔 신애는 나름 대도 열심히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행복도 조금씩 조금씩 찾아가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늦은 밤 숨바꼭질을 좋아하는 아들 준이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입니다.
유괴를 당한 것이지요.
결국 아이는 싸늘한 죽음으로 신애 품에 안기게 됩니다.
그 때 주인공 신애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울고 또 우는 것입니다.
울분을 토하는 것 외에는 신애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신애의 울분과 절규를 유일하게 용납한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어디인가 하면, 바로 밀양시내에 있는 작은 개척교회 부흥회였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를 체험한 신애는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에 몰입하게 됩니다.
신앙의 힘으로 안정을 찾은 신애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직접 찾아가서 용서하기로 다짐을 하게 됩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말렸지요.
원수를 사랑하는 것.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애는 유괴범을 찾아갑니다.
드디어 신애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유괴범은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떨기는커녕 얼굴빛이 너무도 좋고 평온한 것입니다.
마치 성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책감이라는 것을 조금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신애는 당황하게 됩니다.
더욱 신애를 당황하게 한 것은 이미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했다는 유괴범의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용서한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 것’에 대한 간증을 듣는 순간 신애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배신감을 느낍니다.
‘하나님이 용서하면 모든 것이 끝난 것인가? 내가 용서를 하지 않았는데, 이미 모든 용서를 받았다니?’
말도 안 된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용서가 하나님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이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이 영화가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 곧 죄 사함이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생명의 모든 주권이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에게만 있기 때문에 구원의 주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여기에 인간이 개입될 부분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죄인의 구원이 완성되고 또 온전해 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밀양의 주인공 신애가 품었던 의문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과연 한 아이를 유괴하고 죽음으로 몰아간 유괴범의 말대로 ‘이미 주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했다’는 그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그에 따른 인간의 책임 영역은 없는가? 입니다.
적어도 양심의 가책이라든지 말입니다.
이러한 고민은 오늘 본문을 기록한 야고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믿음’이라는 경건의 모양만 있다고 해서 진정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입니다.
어떻습니까?
‘믿음’만 있으면 됩니까?
네, 구원의 출발은 믿음입니다.
‘죄 사함’을 얻는 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다면 그래서 구원의 은총 속에 들어갔다면, 그것에 걸 말은 믿음의 삶, 믿음의 행실이 반드시 뒤 따라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여기서 우리는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믿음과 행함에 대한 개념이해가 필요합니다.
지금 야고보가 문제를 삼는 것은 경건의 모양에만 머물러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
능력 없는, 생명 없는 믿음이지요.
반면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란?
구원에 이루는 행함으로 바로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는 것’을 뜻합니다.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이처럼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란 바로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어디서요?
믿음을 가진 우리 삶 속에서 그리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 속에서입니다.
좀 더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자, 우리가 경건의 모양으로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아주 주관적이지요.
이것만으로는 ‘그 사람의 믿음이 있다 없다, 성숙하다 성숙하지 않다, 온전하다 온전하지 않다’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경건의 모양으로서 믿음을 가지 있다고 주장하는 어떤 성도가 15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처럼 일용한 양식을 구하는 가난한 형제자매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면 특히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적극적으로 베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자기를 구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이 야고보의 가르침입니다.
쉽게 말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 없이 구원을 말할 수 것처럼 가난한 이들을 향한 믿는 이들의 긍휼함 없이는 믿음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일만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라면 우리 역시 우리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진 자를 탕감해 주는 것이 마당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 답게 우리 역시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고보가 말하는 구원에 이르는 ‘행함’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 살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야고보가 말하는 ‘긍휼의 행함’을 왜곡하여 전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주 아픕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란 단순히 율법의 실천, 말씀의 실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실천, 말씀의 적용’,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한 행함으로 말마임아 구원을 받게 다는 인간의 교만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가 말하는 ‘긍휼의 행함’을 왜곡하여 전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주 먹먹해 집니다.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주장은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의 긍휼을 입은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그 증거이고 몸의 부활이 그 증거입니다.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의 믿음이란 나로부터 출발하는 내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긍휼)로 말미암아 믿음입니다.
바로 믿어지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어지는 믿음 이렇게 설명합니다.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17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또는 '이것은 믿음에서 출발하며 믿음을 목표로 합니다.'(합 2:4)
따라서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는 자들이라면 하나님의 은혜(긍휼)를 입은 자답게 우리의 형제에게 그리고 우리의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그리고 연약한 이들에게 더욱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고보가 말하는 구원에 이르는 행함,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는 성경 속에서 행함 있는 믿음,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된 경우를 두 가지를 언급합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이고 하나는 기생 라합의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갈대아 사람입니다.
기생 라합 가나안 사람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그들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들에게는 구원받을 만한 믿음의 행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아들 이삭을 받치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기생 라합의 경우는 하나님의 사자를 접대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야고보는 2장을 정리하며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사도 야고보가 아주 단호합니다.
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요즈음 교회마다 탄식입니다.
이제는 부흥이 멈추었다고 말합니다.
추문만 들려오지 부흥의 역사가 새롭게 나타났다는 신나는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망각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교회의 긍휼 없음, 성도의 무자비함입니다.
긍휼, 다른 말로 바꾸면 자비가 됩니다.
慈는 사랑하는 마음이고 悲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래서 친절을 베풀 수밖에 없는 마음의 상태가 자비이고 긍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1987년입니다.
한국 개신교회가 부흥의 꼭지점을 찍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 때 민주화를 위해 거리로 나간 청년 그리고 지식인들 그리고 노동자들을 한국교회는 불순한 세력으로 매도했습니다.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무 조건 없이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자비를 베푼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명동성당입니다.
거리에 내 몰린 백성들에게 유일하게 자비를 베푼 곳이 명동성당입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한국천주교회는 230년 선교 역사 속에서 가장 강력한 부흥을 맛보고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 거리에 내 몰린 가나나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교회의 부흥을 소원하십니까?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긍휼하심 그대로 하나님의 긍휼을 가난한 형제 자매에게 베풀어 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6절의 말씀처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는 말씀 그대로 살아보는 것입니다.
2: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긍휼하심)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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