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얻는 것이 진정한 부자입니다
잠언22:1-2절 2016/8/21(주일오후)
22:1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22:2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잠언’입니다.
잠언.
다양한 주제의 지혜들과 금언들이 특별한 질서나 구조 없이 나열되어 있는 것이 잠언의 특징입니다.
예를 들자면, 1장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3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지,
어떻게 해야 공의로운지,
또 어떻게 해야 정의로운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등등등...
다양한 인생의 주제들에 대한 지혜와 훈계들이 특별한 질서 없이 나열되어 있는 것이 바로 잠언의 특징입니다.
잠언.
인생과 관련된 정말 많은 주제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우리가 특별히 살피고자 하는 주제는 ‘가난과 부’입니다.
‘가난과 부.’
쉽지 않은 인생의 주제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우리도 모르게 가난과 부에 대한 학습되고 각인된 선입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과 부’에 대한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견해, 즉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교착점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는 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재미있는 사실은 누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애를 쓰지만 정작 자신을 부자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다 보통사람이고 다 서민이지요.
서민,
사회적 특권이나 경제적인 부를 가지지 못한 사람을 우리가 서민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회적 특권이나 경제적인 부를 가진 사람들도 자신을 서민이라고 말하고,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연출하듯이 억지웃음을 지어가며 서민노릇 하는 것을 보면 참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우리사회가 ‘가난과 부’에 대한 왜곡이 심하다는 반증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시간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일단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난과 부’에 대한 선입견들을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가난과 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일단 내려놓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 그 성경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은 ‘가난과 부’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가난과 부’에 대한 말씀과 설명이 여럿이 있겠지만 제가 오늘 택한 본문은 잠언 22장 1절과 2절입니다.
아주 짧은 말씀이지만 ‘가난과 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우선 1절입니다.
22:1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잠언을 수집하고 기록한 지혜자가 말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많은 재물을 얻는 것도 참 중요하지만 이것보다 먼저 택할 것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명예'입니다.
우리 성경은 ‘명예’라고 번역해 놓고 있지만 '좋은 평판'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좋은 평판’ ‘good name’ ‘명성’이지요.
재물을 쌓아 놓고 살아가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받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래서 잠언의 지혜자는 이어서 우리에게 이런 삶의 자리로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22장 1절 후반부입니다.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
은이나 금도 좋지만 무엇을 더욱 택하라고 권면합니까?
‘은총’입니다.
‘은총’
여기서 사용된 '은총'이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은총 바로 ‘호의’입니다.
‘친절한 마음씨’이지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많은 재물보다 좋은 평판을 택하는 것이 좋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면 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많은 재물을 얻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먼저 좋은 평판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래야 많은 사람들로부터 좋은 호의, 친절한 마음씨, 곧 사람의 은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금으로 살 수 없는 사람의 마음씨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재물보다 좋은 평판을 택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예수님의 비유 하나가 있지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비유입니다.
16: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16: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16: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16: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16: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16: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16: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16: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이처럼 전혀 옳지 않은 불의한 청지기가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정답이 바로 그 다음절에 나옵니다.
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친절한 마음씨, 바로 사람들로부터 호의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 ‘사람의 호의’ ‘사랑의 은총’입니다.
재물보다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존경과 호의가 더 믿을만하다는 뜻입니다. 비록 손에 쥔 것이 없다할지라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는 호의가 더 든든한 재산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맞는 말이지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가 정말 얻어야 할 것은 재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에 어느 정도 다 동의할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너무나 자주 잃어버리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배신해도 돈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거짓된 가르침, 거짓된 신념들이 교회를 오염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사람은 배신해도 돈은 배신하지 않는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돈으로 모든 것을 증명하려고 합니까?
아직도 돈이 있어야 사람이 따라온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배신이 흔한 사회에서 물질이 중심이 되는 현실 속에서 어쩌면 사람보다 돈이 더 정직할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어느 정도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좀 깊이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돈으로 사람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뇌물로 사람을 매수하고, 선물로 내 편을 만드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불법이고 불의함 인줄 알면서도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사회 현실입니다.
하지만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잠언의 지혜자는 말합니다.
1절에 나오는데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명예’ 곧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좋은 평판‘ 이고, 또 하나는 ’사람의 호의‘ 곧 ’친절한 마음씨‘입니다.
‘좋은 평판’과 ‘호의 곧 친절한 마음씨’
이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변에서 이런 경우를 종종 보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어려움을 당했을 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아파하며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시간과 물질을 내어 돕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반면,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큰 어려움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제는 이 땅의 종교인들을 대표하는 목사님들 신부님들 그리고 스님들이 세상으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 맛’입니다.
돈 맛을 본 순간 마땅히 받아야할 칭송과 ‘좋은 평판’은 사라졌고 그리고 그분들이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호의는 이제 추억속의 이야기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런 현실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누가 진정한 부자이고 가난한 사람일까?
기억하십시오.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중 그리고 호의를 얻는 것이 재산 중에 재산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친절하십시오.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먼저 친절을 베푸십시오,
그래서 재물을 얻기 보다는 사람을 얻는 사람의 부자가 되십시오.
좋은 평판도 듣고 또 사람들로부터 친절한 마음씨까지 얻는 진정한 부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니다.
이번에는 2절입니다.
22:2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이 구절에는 적어도 ‘가난과 부’에 대한 두 가지의 가르침이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 문자 그대로인데 ‘하나님 앞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다르지 않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다르지 않다’
‘가난한 자와 부한 자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다’
당연하지요.
우리에게는 아주 당연합니다.
하지만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결코 당연한 말씀이 아닙니다.
아주 뜻 밖에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가 하나님의 축복이며 가난은 하나님의 징벌이나 저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난한 자와 부한 자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다’라는 말이 뜻 밖에 말씀이지요.
불행하게도, 오늘날에도 그렇게 믿고 또 그렇게 설교하는 사람들이 우리 교회 안에 있습니다.
부가 하나님의 축복이고 가난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믿고 또 그렇게 설교하는 이들이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참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그러한 오해를 수정하게 합니다.
가난과 부는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부여해 주신 '분복'(lot)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따라서 부자라고 으시댈 이유가 없고, 가난하다하여 주눅들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예수님의 젓 동생인 야고보도 한 몫 거듭니다.
야고보서입니다.
1:9 낮은(가난한)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낮은 형제란 가난한 형제를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 늘 낮아질 수밖에 없는 가난한 형제입니다.
입이 있고 생각이 있고 헌신의 몸짓이 있어도 자기주장을 말할 수 없는 낮은 형제입니다.
그 낮은 형제는 더 이상 교회 안에서 주눅들이 말고 이제는 당당하게 자기의 높임을 자랑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그리스도인이 자랑할 만한 자기의 높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 내용이 18절에 나옵니다.
1: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그러니 가난하다고 해서 기죽지 말고 모든 피조물 중에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은 그 하나님의 높임을 당당하게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 반대의 경우입니다.
10절입니다.
1: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부한자의 물질.
풀의 꽃 같이 잠시 좋을 수는 있습니다.
자랑하고 뽐 낼만 하지요.
하지만 문제는 그 자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한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의 자랑이 사라지고 오직 영원하신 꽃 그리스도만 남게 된 것을 오히려 더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는 말의 뜻입니다.
그래서 다시 오늘 본문 잠언으로 돌아오면, NIV 성경을 비롯하여 많은 영어 번역본들도 2절을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부와 가난에 공통점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그 둘을 모두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두 번째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자와 부자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지금처럼 ‘주종관계’ ‘갑과 을의 관계’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잠언22:2절입니다.
22:2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입니다.
이것을 직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만난다.’
타락한 사회, 타락한 교회의 특징이 있습니다.
끼리끼리 모이는 '유유상종'(類類相從)입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심하게 분열되는 시간이 주일 아침 11시라는 사실은 공포스러운 일입니다.
(It is appalling that the most segregated hour of Christian America is eleven o'clock on Sunday morning.)
교회가, 그 어떤 조직보다 그 어떤 단체나 나라보다 역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만나는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이 교회를 싫어하고 복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만나는 예배의 공동체, 친교의 공동체 그리고 사귐의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웨슬리(John Wesley)가 감리교인이 된 어느 부자 여인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의 대화가 교양 있고 품위 있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지 않게 하십시오.
당신처럼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매여,
당신도 나와 함께 그분이 사신 것처럼 사시기 바랍니다.(중간생략)
저는 당신이 가난한 사람들과 더 많이 만나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만일 복음을 맛보지 않았다면, 당신이 천국으로 보내야 할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당신이 아는 어떤 사람들보다 더 많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 사이에 파고 들어가십시오.
진흙더미 속으로 그리고 구역질나게 하는 수많은 환경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그곳에서 숙녀 됨을 벗어 버리십시오
크던 작든 우리에게는 노동의 대가로 금전적인 보상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지요.
선물.
아마도 그것은 혼자 사용하라고 주신 선물이 아니라 함께 나누도록 주신 선물일 것입니다.
그 선물로 친절을 베푸십시오.
특히, 가난한 이들 사이에 파고 들어가십시오.
진흙더미 속으로 그리고 구역질나게 하는 수많은 환경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렇게 해서 좋은 평판과 사람들의 친절한 마음씨를 얻는 진정한 부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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