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로이’ 살피시는 하나님
창세기 16:7-16절 2016/7/31(주일)
16: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16: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16: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6: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6: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16: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6: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16: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이곳에서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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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말씀의 주제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아닌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마엘’ 아브라함이 낳은 첫 번째 아들입니다.
우선 이스마엘의 아버지 아브라함(아브람)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에 관한 말씀은 창세기 11장 후반부터 시작해서 25장 중반까지 꽤 길게 나와 있습니다. 그만큼 그의 인생이 평탄치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의 고향, 어디입니까?
갈대아인이 사는 땅 곧 바벨론 우르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이 점을 우리가 꼭 주목하셔야합니다.
아버지 데라와 함께 바벨론 땅 우르에서 살았던 아브라함은 거기서 아내 사라(사래)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아버지 데라를 따라 다메섹 동쪽에 있는 하란으로 와서 정착하여 살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란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찾아 오셔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유명한 창세기 12장 1절과 2절, 축복의 언약입니다.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축복은 두 가지입니다.
2절입니다.
첫째 너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고,
둘째 네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나 약속의 땅, 그리고 축복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조카 롯과 롯의 가족도 함께 동행 하였습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도착해보니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기근이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가 더부살이를 하게 됩니다.
더부살이로 빌어먹어야 했기에 그곳 사람들과 바로를 속여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소개했습니다.
인생 ‘세옹지마’라 하지요
아브라함은 사라 덕에 한밑천을 단단히 챙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할 수 없는, 참으로 구차하면서도 비루한 복을 얻은 것입니다.
기근이 끝나자 다시 약속의 땅으로 아브라함이 돌아오지만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목초지, 땅을 두고 조카 롯과 갈등을 겪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좋은 땅을 조카 롯에게 먼저 양보하고 정작 자신은 그 반대쪽 거친 땅으로 향하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그 거친 땅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 찾아와 다시 한 번 축복의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두 번째 언약의 축복입니다.
13: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3: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3:16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3: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여기에 보면, 첫 번째 약속과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는 ‘명성’ 대신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라는 땅의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첫 번째 약속과 공통점이 있다면 역시 자손에 대한 축복입니다.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입니다.
이러한 두 번째 약속 이후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렸습니다.
양과 염소 같은 재산이 아주 많이 늘어났고, 그들을 치는 목자들 또한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뿐 만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집에서 낳아 훈련시킨 사병이 삼백 명이 넘었습니다.
문제는 이 많은 종과 재산을 상속할 자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따지듯이 항변합니다.
15: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 뿐입니다.‘
이처럼 자식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마음은 항상 어두웠습니다.
밤잠을 설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장막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리고 밤하늘을 보이시면서 또 자손에 대한 반복된 말씀을 하십니다.
15: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세 번째 약속 역시 자손에 대한 축복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완전하고 신실하게 실현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상속자, 바로 자식이 꼭 필요했습니다.
대를 이을, 생명을 이을, 하나님의 축복을 이을 사내아이가 꼭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이가 태어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생물학적으로 아브라함과 사래는 이미 자녀를 기대할 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늙은 아내 사래가 한 가지 현실적인 제안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16장 1-2절입니다.
16: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젊은)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자기의 젊은 몸종인 하갈과 동침하여 아이를 얻고, 그 아이를 통해 집안의 대를 이어가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아브라함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작정 기다리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을 잠시 접어두고 풍습에 따라, 차선의 방법을 시도해 보겠습니까?
안타깝게도 아브라함은 사람들의 풍습을 따라 차선을 선택하고 그 일을 행합니다.
아브라함 당시 함무라비 법전이나 누지(Nuzi) 문헌에 따르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자신의 몸종을 남편에게 소실로 줄 수 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본부인의 친자식으로 간주했고 아이를 낳은 여종은 유모로 승격이 되었습니다.
이 방법에 아브라함과 사래가 동의한 것입니다.
사실 이들의 선택과 행동이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들 다하는 풍습이었고, 그리고 법이 보증하는 합법적인 일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 불행한 일이 그 가정에 일어나게 됩니다.
행복을 위해서 선택한 일이 결국, 모든 가족 구성원들에게 상처를 주는 불행이 되고 말았습니다.
몸종 하갈이 임신하자 자기의 여주인을 멸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6: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그러자 상처 입은 사래가 하갈에 대해 불평을 터뜨립니다.
16: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쉽게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아브라함은 당시 관습법에 따라 하갈에 대한 처분권을 사래에게 모두 맡기게 됩니다.
16: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이 말이 떨어지자 남편의 묵인 하에 사래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자신의 몸종 하갈을 학대하게 됩니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하갈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자신과 아기의 장래를 위해 광야로 도망을 치는 것 뿐 이었습니다.
그래서 하갈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무작정 도망을 칩니다.
여러분, 이런 하갈을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실까요?
주인에게 버림받은 천덕꾸러기로 내 버려두실 까요?
아니면 이 여인에게도 하나님 은총의 햇살이 비춰질까요?
이 문제의 답을 찾는 것이 오늘 본문을 푸는 열쇠가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사래의 몸종이면서 아브라함의 씨를 품은 하갈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 여기서 우리가 이 전에 가졌던 신앙의 관습과 종교적 편견을 잠시 내려놓고 오직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갈이 수르(술)로 가는 길 가에 있던 샘물에 당도했을 때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천사가 다가와 걱정스러운 듯 말을 건넵니다.
16: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수르)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16: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아주 참 단순한 문답입니다.
하지만 하갈은 ‘어디서 와서'라는 질문에는 답하고 있지만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갈 바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천사가 하갈에게 어디로 가야할지에 대한 답을 찾아줍니다.
어디입니까?
16: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해답입니다.
결심하고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라니 이처럼 난감한 해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천사는 하갈이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이야기를 하나 들려줍니다.
그것이 10절에 나옵니다.
16: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어떻습니까?
어디서 많이 본 말씀이지요.
누구에게 한 약속입니까?
창세기 12장과 13장 그리고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것과 동일한 약속이 사래의 몸종 하갈에게도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발견하셔야합니다.
대반전이지요.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사자가 태어날 아이의 이름까지 지어줍니다.
태어날 아이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스마엘’입니다.
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이스마엘’
그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평이 열려야 합니다.
‘선민 이스라엘’ 그 사상에 고착된 유대인과 다른,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평이 열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유대인의 시각이 아닌 그리스도인의 시각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신앙을 정립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할례 받은 민족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고통 받는 이들, 비록 그가 천대 받는 이스마엘의 후손이라 할지라도 고통 받는 이들의 부르짖는 소리까지 들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믿어지십니까?
적어도 구원의 있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에 있어서, 혈통이 다르다고, 이념이 다르다고, 신분이 다르다고, 종교가 다르다고 우리처럼 차별하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고통 받는 이들이 부르짖음이라면 광야에서도 들으시는 구원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대자(큰 사랑을 가지신 분) 그리고 대비(불쌍히 여겨 구원하시는 분)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은 곧 그 일에 친히 개입하여 그들의 한을 풀어주신다는 말도 됩니다.
구원이지요.
천사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16: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어떻습니까?
이 본문의 해석이 뜨거운 논쟁인데, 이것이 축복의 말씀으로 보입니까 아니면 저주의 예언으로 여겨지십니까?
분명한 것은 문맥상, 저주의 예언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셨다’라는 ‘이스마엘’의 이름을 주신 하나님이 앞과 뒤가 다르게 말씀하실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관습과 종교적 편견에 빠진 이들이 이 본문의 해석을 자기 맘대로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12절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된다’라는 말을 그릇되게 해석해서 마치 오늘날의 극단적인 테러리스트처럼 이스마엘의 후손들을 ‘전쟁광’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특히 미국 교회의 영향을 받은 한국 교회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너의 아들은 들나귀처럼 될 것이다.’라는 천사의 예언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의 뜻은 혹독한 삶의 조건, 곧 광야와 같은 인생 속에서도 강인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축복입니다.
결코, ‘미친 전쟁광’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명에 위협을 가하거나 위축시키려 하는 온갖 힘들에 맞서 싸우는 강인한 전사가 될 것이라는 일종의 축복의 선언입니다.
이 선언을 듣자마자 하갈은 어마어마한 감동과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정말 놀라운 것은 자기가 만난 하나님에게 이름을 하나를 붙여 줌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을 아주 적극적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16: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곧 하나님을 ‘엘 로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갈이 서있던 그 샘의 이름이 ‘브엘라 해로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나를 살피시는 살아 계시는 분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고통 받는 이들의 부르짖음을 차별 없이 들으실 뿐만 아니라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을 차별 없이 두루 살피시고 치료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몸종이었던 하갈도, 교회 밖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을 볼 때, 불쌍한 이들을, 고통 받는 이들을 ‘살피시는 하나님’ 곧 ‘엘 로이’라고 고백하고 살아가는데 오늘 우리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고난 받는 이웃에 대해 너무 무자비하고, 고통 받는 세상에 대해 너무 무관심한 것은 아닌지요?
마음이 먹먹하고 창피한 것은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려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믿는 다고 하는 우리들 역시 이웃의 아픔에, 세상의 신음에 더 무자비하고 더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잠언의 말씀을 한 구절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새 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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