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행하는 자
야고보서1:22-27절 2016/7/27(수)
1: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1: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1: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1: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야고보 사도가 목회 할 당시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 시작은 한 가지로부터 출발합니다.
입니다.
바로 물질의 시련입니다.
특히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마저 등질만큼 어려웠던 경제적 시련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직면하고 있었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습니다.
복습하는 의미로 1장 1절부터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디아스포라)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1: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그리스도인들은 원래 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한 마음인가?
요한계시록 22장 20절입니다.
22: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의 신앙.
이것이 초대 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한 마음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든 안디옥교회든 고린도교회든 에베소초대교회든 그리고 유대그리스도인이든 아니면 이방그리스도인이든 흩어진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품었던 한 마음이 ‘마라나타’의 신앙입니다.
아멘(그렇습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런데 이 한 마음이었던 초대 교회 성도들이 물질의 시련이 찾아오자 두 마음으로 갈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마음과 세상으로 향한 마음으로 갈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강림.
주님의 재림이겠지요.
‘파루시아’가 점점 지연되자 이 전에 과감하게 버렸던 세상의 것들이 다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나바처럼 자신의 것을 전부 팔아 교회를 섬겼던 이들이 ‘파르시아’가 점점 지연되자 물질에 대한 미련이 잡초처럼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떠한 현상이 나타났는가 하면, 8절만 새 번역으로 읽습니다.
1:8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이요, 그의 모든 행동에는 안정이 없습니다.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라는 예수님의 비유처럼 믿음의 결과는 항상 그 사람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법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출발했던 그의 모든 행동들이 안정감이 없는, 다시 말해 신앙과 생활이 일치되지 않는 불안한 행동을 보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 것과 그리고 실제로 행하는 것이 일치가 되지 않는 불안정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2절과 3절 말씀처럼 성도가 당하는 시련은 그냥 시련이 아닙니다.
‘인내’라는 성령의 열매를 만들어 내는 시련이라고 야고보는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이 시련을 야고보 사도는 3절에서 ‘믿음의 시련’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시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2절의 말씀처럼 여러 가지 시험이 와도 온전히 기쁘게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인내’를 얻게 하는 유익한 시련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재림이 지연되자 이러한 굳건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인내’ 하는 마음과 함께 그 반대 마음인 ‘염려하는 마음’도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야고보 사도가 지적한 두 마음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에게 있어서 물질의 시련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여주시온교회 이야기)
그렇다면 ‘성도의 두 마음’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고 또 어떻게 풀어 나아가야 할까요?
야고보 사도가 제시한 첫 번째 해결방법이 9-21절에 나옵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자기 욕심에 이끌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라 것입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린다면 자족하는 삶입니다.
9절-21까지 봅니다.
1: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1: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염려를 품게 하는 ‘욕심’에 이끌리는 삶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능히 구원하는 하나님의 ‘말씀’ 곧 이미 ‘내 마음에 심겨진 말씀’에 따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21절만 새 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1:21 그러므로 더러움과 넘치는 악(특히 물질에 대한 탐욕을 말함)을 모두 버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욕심을 심으면 그 끝은 사망이지만 이미 우리 안에 심어 주신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면 그 말씀이 우리를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두 번째로 야고보가 제시한 해법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첫째가 우리 속에 심어 주신 말씀을 ‘믿는 것’이라면 두 번째는 그 말씀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실천, 행함입니다.
지금 초대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여러 가지 시련으로 인한 1장 8절의 상태입니다.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다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가 두 번째로 제시한 대안이 1장 22절입니다.
1: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속지 말라’라는 야고보의 간곡한 부탁입니다.
어디 어디에 나옵니까?
첫째는 1:16에 나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입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이 속임수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질의 시련을 포함해서 성도의 모든 시련이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가르치는 이들에게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질로 인한 시련은 자기 욕심의 결과이지 하나님이 주신 시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물질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우리를 능히 구원할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이 이미 우리 마음 밭에 심겨졌으니 그 말씀을 잘 살펴서 온유함으로 받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속지 말라’는 말이 어디에 나옵니까?
1: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이것은 앞에 속임수와 달리 내적인 속임수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다시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그리스도인이란?
우리를 구원할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마음에 심겨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당연히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행동이 일치해야합니다.
그런데 1장 8절의 말씀처럼 우리 안에 두 마음이 들어와서 이 구원의 역사가 어그러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내린 결론이 1: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입니다.
‘제발 심겨진 말씀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 안에서 열매를 맺는지는 그 말씀을 받은 사람의 변화된 삶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 야고보는 말합니다.
결코 듣는 것으로는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것을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비유 하나를 듭니다.
1: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1: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1: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좀 쉬운 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1:23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1:24 이런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떠나가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곧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1:25 그러나 완전한 율법 곧 자유를 주는 율법을 잘 살피고 끊임없이 그대로 사는 사람은, 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행한 일에(행한 일로) 복을 받을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 들은 말씀이 행함으로 이어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분의 특징은 혀 곧 입으로만 끝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이라는 거울을 비추어 볼 때,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명확하게 압니다.
문제는 그 말씀이라는 거울을 떠나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금방 잊고 세상 염려에 빠져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믿음이 역사하는’ 행함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 또 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믿음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지요.
이 분의 특징은 말씀을 결코 버리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이 이미 자기 삶의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야고보는 25절에서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가진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율법’이란 그것이 우리에게서 ‘자유롭게 지켜질 때’ 그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받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지키지 않으면 그 율법은 아무 소용없는 법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은 그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 의해 ‘자유롭게 지켜질 때’ 완전한 율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야고보의 설명이고 가르침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의 자율적인 실천과 함께 야고보가 권면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경건’입니다.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여기에 보면 야고보는 두 가지의 경건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른데 27절입니다.
첫째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서 돌보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입니다.
문제는 경건의 능력을 상실케 하는 ‘혀’입니다.
야고보의 말입니다. 26절(새번역)
‘누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혀를 다스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다시 말해 말로만 하고 몸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이 사람의 신앙은 헛된 것입니다.’
‘헛된 신앙’
여기서 자유 할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늘 그렇지만 몸보다 먼저 앞서는 것이 사람의 혀이고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의 권면처럼 우선 자기 혀를 재갈 물리고 ‘경건’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첫째,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고
둘째,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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