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야고보서 2장 1-17절 2016/8/10(수)
현대사에 기억되는 두 명의 축구영웅이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축구영웅 마라도나와 브라질의 축구영웅 펠레입니다.
축구라는 한 가지를 놓고 볼 때, 그들이 보여준 실력과 업적은 정말 대단합니다.
마라도나와 펠레.
누가 축구를 더 잘했나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개인 취향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축구 이후 인생을 누가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했을 때 그 답은 아주 확연하게 한쪽으로 쏠리게 됩니다.
마라도나 보다는 펠레에게 사람들의 마음이 쏠립니다.
마라도나, 축구선수치고는 상당히 키가 작습니다.
165cm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하나로 돈과 명예를 성취한 사람이 마라도나입니다.
아르헨티나의 국민영웅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종종 ‘악동’이라고도 부릅니다.
왜 그럴까요?
명성(이름)에 걸 맞는 말과 행동이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브라질의 축구영웅 펠레는 축구를 통해서도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았지만 선수 생활 이후에도 그가 보여 준 성숙한 말과 행동은 브라질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명성(이름)에 걸 맞는 말과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름의 걸 맞는 말과 행동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척도가 됩니다.
야고보 사도가 목회할 당시 교회마다 겪는 공통적인 문제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걸 맞는 말과 행동이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몸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삶이 믿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삶과 믿음의 불일치이지요.
그 결과 어떤 현상이 나타났는가 하면 1장 8절입니다.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안정감)이 없는 자’가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함 곧 안정감이 없는 신앙생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모든 일에 안정감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옛 사람처럼 길과 진리와 생명을 찾기 위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 필요가 없습니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그리스도, 그분을 향한 한 가지 마음을 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깁니다.
파루시아, 주님의 재림이 점점 지연되면서 이 안정감이 조금씩(조금씩) 깨지기 시작합니다.
안정감이 깨지자 마음은 다시 이전처럼 둘로 갈라지게 되었고 이리 기웃 거리 기웃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안정감을 상실한 신앙생활은 초대 교회가 반드시 풀어야할 숙제 중에 가장 큰 숙제였습니다.
‘안정감’에 대한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에게는 두 개의 육체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썩어질 육체이고 또 하나는 썩지 않을 육체입니다.
이 썩지 않을 육체를 보는 것이 바로 ‘믿음의 눈’이지요.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썩지 않을 육체 곧 영생하는 부활의 몸에 관심을 두고 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전혀 관심이 없었던 영생에 대해 관심을 두게 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러한 믿음의 눈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무뎌지고 희미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지연되지요.
설교는 매일 똑같이 들리지요.
예배(성만찬) 역시 항상 반복이지요.
모이는 사람은 늘 같지요.
기도 생활 역시 변화가 없지요.
이처럼 믿음의 눈을 새롭게 할 만한 어떤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이 전에 재미난 것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세속과의 타협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사도로서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이런 권면을 합니다.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무슨 말입니까?
신앙생활을 할 때 주님의 재림처럼 어떤 강력한 변화가 없다고 해서 다시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국, 그것들은 다 썩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물질, 결국 썩는 것입니다.
명예, 결국 썩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야고보나 바울이 목회 할 당시 초대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야고보.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으로서 이 문제를 가만 두고 볼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쓴 편지가 야고보서입니다.
야고보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쓴 편지에서 이 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해법을 실제적으로 제시합니다.
그 첫 번째가 1장 12절입니다.
세속과 타협하지 말고 옛 사람과 타협하지 말고 우리 속에 심겨진 진리의 말씀을 다시 끄집어내라는 것입니다.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왜 우리가 옛 사람의 더러운 것과 세속의 악을 내버려야 합니까?
그것 자체가 썩어질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물욕과 탐심), 본능이지요.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물질 자체가 영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질이 우리를 영생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돈을 사랑하지 말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 하나님 나라에서는 쓸모가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예, 본능이지요.
문제는 그것 역시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의 표현을 빌린다면 풀의 꽃같이 사라지는 것이 바로 명예입니다.
잠시 잠깐이지 영원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 역시 내버리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마음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말의 때, 위기의 때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우리가 기울어야하는가?
첫째, 21절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입니다.
그것만이 능히 우리를 썩어질 것들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보고가 제시가 첫 번째 해법입니다.
두 번째 해법은 첫 번째 것과 연결되는 것으로 22절입니다.
‘1: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생하는 말씀, 진리의 말씀, 썩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마음 판에 믿음으로 받았다면 그 말씀을 들은 대로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왜?’ 라고 따져 묻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항상 행함이 증거가 됩니다.
‘믿음이 있다 없다’는 그 사람의 행실을 보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혀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그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이나 바울이나 야고보나 모든 사도의 공동된 견해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나 바울이나 사랑의 으뜸 되는 외적증거로 ‘원수사랑’을 제시한 것입니다.
원수사랑은 혀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끝을 ‘원수사랑’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좀 긴 본문이지만 찾아보겠습니다.
로마서 12장입니다.
12: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2: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2: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외적증거)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세 번째입니다.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기울어야하는가?
말씀을 행할 때 결코 차별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을 대할 때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야고보는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는 증거를 어디서 찾아 볼 수 있는가?
그것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는 것’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차별, 이 역시 사람의 본능이지요.
차별이 없는 세상은 없습니다.
차별이 없는 사람도 없지요.
알게 모르게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차별하면서 살아갑니다.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잘 생긴 사람과 못생긴 사람.
지식이 많은 사람과 지식이 없는 사람.
한국사람과 일본사람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
흑인과 백인.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차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차별에 대한 한 예가 등장합니다.
2: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2: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2: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2: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2: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2: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2: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2장 1절처럼 우리가 적어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9절의 말씀처럼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사람을 대할 때 그가 부유한 자이든 아니면 가난한 자이든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야고보는 믿음의 증거로 ‘차별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10절 이하에 나옵니다.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2: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2: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예를 들어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차별을 했다고 합시다.
사람을 차별 했다고 십계명을 어긴 것은 아닙니다.
십계명 어디에도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라는 계명이 없습니다.
하지만 8-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2: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여기에 보면 성경에 기록된 최고의 법이 나옵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그러니까 야고보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어기는 것과 같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 율법의 가치로 볼 때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은 마치 최고의 계명을 어기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범법자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의 율법을 2장 12절에 나오는 것처럼 ‘자유의 율법’으로 우리가 적극 받아들여 행하면 아무리 범법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좀 어려운 말인데, 무슨 말인가 하면 이런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범법자입니다.
그래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합니다.
어떻게요?
무자비하게 사람을 대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맘대로 사람을 차별하여 대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범법자로서 이미 심판은 확정된 것이기 때문에 자비할 필요가 없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3절의 말씀처럼 범법자인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차별이 아니라 하나님의 제일 속성인 긍휼로 대하면, 모세의 율법처럼 명령이 아니라 자유의 율법으로 대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다시 13절입니다.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있지만 그러나)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긍휼이 심판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긍휼, 곧 사랑의 행위가 심판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좀 어렵지요.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명성에 걸맞기 위해 어떻게 믿고 어떻게 행동하며 살아야 하는가?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혀 속에만 머물러 있는 믿음은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믿음이 참된 믿음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성에 걸 맞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 구체적인 가르침이 15절 이하에 나옵니다)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한 마리로 정의하면 우리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그 몸에 쓸 것을 실제로 주는 것을 통하여 예수님의 사랑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혀에 머물러 있는 믿음’이 아닌 ‘실체로 증명되어지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바로 앞에 나오는 책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을 이렇게 정의한 것입니다.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다)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이 실상(체)으로 증명되는 믿음만이 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하여 ‘실상이 되는 믿음’, ‘증거가 되는 믿음’으로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풀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고보서강해 2:13-26 행함 있는 믿음이란 긍휼입니다 (0) | 2016.08.25 |
---|---|
잠언22:1-2 사람을 얻는 것이 진정한 부자입니다 (0) | 2016.08.23 |
창세기 16:7-16 '엘로이' 살피시는 하나님 (0) | 2016.08.06 |
야고보서강해 1:22-27 말씀을 행하는 자 (0) | 2016.07.28 |
사도행전 18:24-28 아볼로 (0) | 2016.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