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하신 분(위로부터)의 영, 聖靈(神)
이사야 32:15-20절 2016/9/18(주일오후)
32:15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32:16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32:17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32:18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조용히 쉬는 곳에 있으려니와
32:19 그 숲은 우박에 상하고 성읍은 파괴되리라
32:20 모든 물 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명절 잘 보네셨지요?
연휴 동안 시간이 좀 주어져서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다가 함석헌 선생님의 글 ‘씨알의 소리’ 붙잡았습니다.
함 선생님이 책머리에 쓰신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를 찾아 읽다가 이런 인사말과 만났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이름을 알 수도 없는, 알고자 할 필요조차도 없는 씨알 여러분!
하늘의 맑음, 땅이 번듯함 속에 안녕하십니까?
물의 날뜀, 바람의 외침 속에 씩씩하십니까?"
1974년 6월호에 나온 글입니다.
생각이 허용되지도 않고 질문하는 것조차도 불순하게 여기던 시대.
그래서 모두가 숨죽이고 살 수밖에 없었던 그 암흑의 시대.
함 선생님은 남아 있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안부를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냥 잘 있느냐’는 인사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정신 곧 하늘의 생명과 땅의 평화를 맑고 번듯하게 그리고 씩씩하게 이어가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인사가 요즈음 무척 그립습니다.
하늘의 맑음, 땅이 번듯함 속에서 안녕하십니까?
물의 날뜀, 바람의 외침 속에서도 씩씩하십니까?"
‘그냥 잘 있느냐’는 의례적인 안부의 인사도 우리의 가슴을 따듯하게 하지만 맑은 생명과 번듯한 평화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품고 살아가는 씩씩함(담대함)을 묻는 샬롬(평안)의 인사가 더 좋고 더 그립습니다.
양반과 상놈이라는 신분사회가 무너진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값을 매기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돈이 모든 가치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생명의 다리를 이어가고 평화의 문을 열어가는 것이 우리교회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실존의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는 그 과제를 망각하고 더 많은 수입을 얻는 것이 마치 인생의 목적인양 치부되는 세상 속에서 아무 감각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시들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몸이고 이름값인데 그것에 매달려 분주하게 이리 저리 기웃거리는 것을 볼 때 ‘그냥 잘 있느냐’는 인사로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이제는 깨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 그리고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면
‘하늘의 맑음, 땅이 번듯함 속에서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물의 날뜀, 바람의 외침 속에서도 씩씩하십니까?" 라는 평안의 인사, 생명의 인사를 꼭 나누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묵상을 지난 한 주간 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무지와 무감각 그리고 무자비 속에서 살아가는 이 시대를 향하여 하나님의 울부짖는 탄식 소리를 듣게 할 수 있을까 해서 준비한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한 가지 사실을 먼저 밝히면, 오늘 말씀은 2010년 8월 29일에 증거 한 말씀을 기초로 해서 재구성한 설교라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할 당시 최대 강대국 앗시리아가 북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이제 남은 땅 유다를 침공하게 됩니다.
그 때 앗시리아를 통치하는 제국의 왕이 ‘산헤립’이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사르곤 2세’의 아들이지요.
산헤립.
아카드어로 ‘신-아흐헤-리바’라고 발음합니다.
‘신’(Sin)은 당시 메소포타미지역에서 숭배되었던 ‘달(月)신’의 이름이고, ‘아흐헤’는 ‘형제’를 뜻합니다.
그리고 ‘리바’라는 말은 ‘넘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산헤립의 이름을 풀이하면 ‘달의 신이 그의 형제들을 증가시킨다(넘치게 한다)’는 뜻이 됩니다.
산헤립.
실제로 그는 그의 이름처럼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행한 많은 전쟁 속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예루살렘이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 원정에도 직접 나서게 됩니다.
그의 명성으로 봐서 예루살렘 점령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관하는 역사가 어떻게 이 전쟁을 이끌어 가신 줄 아십니까?
전쟁에 능한 산헤립이 파죽지세로 유다의 요새화된 성읍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점령했지만 희한하게도 예루살렘만큼은 점령하지 못합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굴된 ‘산헤립의 기둥’에 보면 그때 원정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둥지 안에 든 새처럼 포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것은 산헤립의 예루살렘 점령(원정), 결국 실패한 역사로 남게 됩니다.
이것을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1장 5절입니다.
31:5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번역 성경을 다시 읽어드립니다.
새가 날개를 펴고 둥지의 새끼를 보호하듯이, 만군의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하신다. 감싸 주고 건져 주며, 다치지 않게 뛰어넘어서, 그 도성을 살리신다.
예루살렘을 누가 살리셨다고 합니까?
유다의 왕입니까, 예루살렘의 시민입니까?
유다의 왕도 예루살렘의 시민도 아닌 만군의 주 여호와가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산헤립의 손에서 예루살렘 곧 자기 백성을 친히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어미 새가 날개를 펴고 둥지의 새끼를 보호하듯이’ 예루살렘을 보호하고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산헤립은 자신의 군대를 모두 동원해서 둥지 안에 든 새처럼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었다고 자신만만했지만 그 보다 더 크신 분, 산헤립보다 더 크신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이 오히려 그런 예루살렘을 새가 날개를 펴고 둥지의 새끼를 품듯이 하나님이 친히 보호하셨고 산헤립의 손에서 친히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악한 마귀 원수가 우리를 대적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쟁으로 인해 예루살렘 주민들은 많은 상처와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이사야는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두 가지의 임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하나는, 유대민족이 처한 위기 상황의 처절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안일한 삶을 계속 누리고 있는 무지하고 무자비한 지도자들을 향하여 준엄하게 꾸짖는 일이였고,
둘째는 그 속에서 낙심한 백성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 새로운 역사를 예비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무지하고 무자비한 지도자를 꾸짖는 일과 그리고 낙심한 백성에게 위로를 주는 일.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의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이사야의 소명이었고 임무였습니다.
이사야는 우선 사회 밑바닥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이 축적해 놓은 부와 그리고 명성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예루살렘 지도층을 향해 이런 죽비를 날립니다.
32장 9-10절입니다.
32:9 너희 안일한 여인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을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딸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32:10 너희 염려 없는 여자들아 일 년 남짓 지나면 너희가 당황하리니 포도 수확이 없으며 열매 거두는 일이 이르지 않을 것임이라
굶주리다 죽고, 전쟁터에서 죽고, 희망이 없어 죽는 백성들이 부지기수인데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지도층에는 호사스러운 삶을 포기하지 않는 여인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지도층의 부인들로 가난한 이들의 사정은 그들의 사정일 뿐 자기들의 현실이 아니라고 애써 못 박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프랑스 대혁명 때 ‘우리에게 빵을 달라’는 군중들의 외침에 ‘빵이 없으면 케익을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던 루이16세의 왕비 ‘마리 앙뜨와네뜨’와 닮은 여인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이사야는 경고합니다.
‘안일한 여인들’, 곧 ‘염려 없이 살아가는 딸들’을 향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10절을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일 년이 채 되지 못하여 몸서리 칠 일이 생길 것”이고, “포도농사가 망하여 거둘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밭농사도 망치고, 사람들이 살던 땅에는 가시덤불과 찔레나무가 자랄 것이고, 기쁨이 넘치던 집과 흥겨운 소리가 그치지 않던 성읍은 적막하게 변할 것이고, 견고한 요새는 파괴되고 망대와 탑이 무너져 돌무더기가 될 것이니 차라리 가슴을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의 눈에 훤히 내다보이는 예루살렘 지도층의 미래였습니다.
반면, 무지하고 무자비한 지도층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었던 가난한 백성들을 향해서는 정 반대의 예언을 하나님이 선포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15-16절입니다.
32:15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32:16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이사야는 여기서 우리에게 새로운 노래, 거룩한 희망의 노래,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거룩한 분의 영, 곧 성령의 노래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희망의 노래 바로 성령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시대에 불러야할 유일한 노래라고 적는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처럼 널브러진 우리 삶에 주님의 생기가 주입되어야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람 빠진 타이어로는 먼 길을 달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의 도움 없이는 선한 싸움을 계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 번 무너진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감싸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거룩한 분의 영, 곧 성령이 오늘 우리에게 오시면 달라집니다.
요엘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2:28-29절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후에(그 다음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이처럼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의 오심, 성령강림입니다.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자유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거룩하신 분의 영, 곧 성령이 우리 가운데 그리고 우리 안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품어야할 유일한 희망이고 우리가 불려야할 새 노래인 것입니다.
찬송가 185장 후렴입니다.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내 주님 보내신 성령이 오셨네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성령이 오셨네.
성령의 오심, 성령강림입니다.
이것이 이사야 예언의 핵심이고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 예수가 전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거룩하신 분의 영 곧 성령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어디에요?
우리 모두 가운데 그리고 우리 모두 안에 입니다.
그래야 맑은 생명과 번듯한 평화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품고 살아가는 씩씩함이(담해함이) 우리 삶 속에 묻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분의 영.
성령만이 잠든 생명을 흔들어 깨우고, 닫쳐진 평화의 문을 부수어 열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바람 곧 거룩한 분의 영, 성령을 만나 하늘의 군대가 되었던 것처럼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시들었던 우리 영혼에도 하나님의 신바람이 불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야 황무지가 기름진 땅이 되고, 광야가 온갖 곡식을 풍성하게 내는 곡창지대가 될 것이며, 그래야 그 광야에서 하나님의 공평이 자리 잡고, 그 기름진 땅에서 하나님의 의가 머무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처 받은 이 세대에 유일하게 제시할 수 있는 해답은 위로부터 오는 거룩하신 분의 영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각 사람에게 임하는 성령강림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2500년 전에 품었던 그 비전을 다시 이 시대에 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세상이야 그런다 치지만 ‘영’을 믿는 다고 하는 교회가 여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령의 오심을 바라보고 간구하기보다는 성령의 존재를 증명할 만한 것들을 더 바라보고 찾아다닙니다.
어리석게도 성령의 오심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의 증명들 곧 눈에 보이는 기적만을 찾아 오늘도 헤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어미 새가 날개를 펴고 둥지의 새끼를 보호하듯이, 만군의 주 여호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친히 보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품속에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 은혜의 자리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의 이런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오늘도 위로부터 오는 ‘샬롬’을 선포하십니다.
17-22절입니다.(새번역)
17 의의 열매는 평화요, 의의 결실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
18 나의 백성은 평화로운 집에서 살며, 안전한 거처, 평온히 쉴 수 있는 곳에서 살 것이다.
19 (비록 삼림이 우박에 쓰러지고 성읍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도,)
20 씨를 뿌리는 곳마다 댈 물이 넉넉하고, 어디에서나 안심하고 소와 나귀를 놓아 키울 수 있으니, 너희는 복이 있다.
여러분, 정말 복 있는 자가 되기를 워하십니까?
위로부터 오시는 거룩하신 분의 영,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교회학교 유치부에 다녀온 꼬마가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셔?”
“그럼 어디에나 계시지.”
“우리 집에도.”
“그럼.”
“이 방 안에도?”
“그렇다니까.” 갑자기 아이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불쑥 물었습니다.
“이 컵 안에도?” 갑자기 대답이 곤궁해졌습니다.
주저하다가 “물론 그 안에도 계시지”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냉큼 컵을 두 손으로 꼭 붙잡더니 “잡았다!” 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냉큼 부여잡고 있습니까?
위로부터 오시는 거룩하신 분의 영, 성령을 냉큼 부여잡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샬롬’, 평화와 안녕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마침 우리의 고백을 담아 부를 수 있는 노래가 하나가 있어서 함께 부름으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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