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이사야26:7-13 정직한 의인의 길

心貧者 2016. 10. 4. 11:30


정직한 의인의 길

이사야 26:7-132016/10/2(주일)

26:7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26:8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26:9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26:10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26:11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나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들을 사르리이다

26:12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

26:13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 가운데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라는 분이 계십니다.

시리아 안디옥 출신으로, 콘스탄티노블, 현재 터기 이스탄불이지요.

그곳에서 활동했던 4세기의 교부입니다.

교부’, 생소하지요.

천주교회에서나 사용하는 언어 같고 조금은 생소할 것입니다.

 

교부란 사도 시대 이후에 등장한 교회의 지도자로 교회의 기초와 신학의 기초 그리고 영성 생활의 기초를 놓은 분들을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Church Fathers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풀이하면 교회의 아버지들이지요.

 

교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해는 빛을 뿜어냅니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지요.

짐승들은 숨을 들이쉬고 내쉽니다. 숨 쉬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물고기들은 강과 바다에서 헤엄을 칩니다. 안 그럴 수가 없어서예요.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단순하게 살기>, 이현주 옮김, 151)

 

어떻습니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크리소스토무스는 4가지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첫째, 기도의 기쁨입니다.

많은 분들이 기도 자체를 짐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이른 새벽에 드리는 개인 기도와 회중을 대표하여 드리는 공동기도를 짐이나 일로 여기는 경향이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교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첫째, 기도 생활로 인한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기도생활 속에서 기쁨을 경험하고 있는지요?

 

두 번째는 찬양의 기쁨입니다.(438)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세 번째는 나눔의 기쁨이고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기도의 기쁨, 찬양의 기쁨, 나눔의 기쁨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기쁨입니다.

 

교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가르침.

사실 우리가 늘 듣던 말씀들의 주제이고 어느 것 하나 낯선 단어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단어 하나하나를 거울삼아 우리 자신을 비춰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지이지요.

더 큰 문제는 이 마땅한 것을 하지 않으면서도 전혀 불편함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무감각이지요.

원인은 둘 중 하나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병들었거나, 아니면 타성에 젖었거나 이지요.

어떻습니까?

기도하지 않는 것이 불편하십니까?

아니면 전혀 불편함을 모르고 살아가십니까?

 

요즘처럼 제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 오늘 뭐 했지?’ 할 정도로 하루를 낭비합니다.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라는 찬송가의 한 대목이 절실하게 다가올 정도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현실의 나날들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든든히 세울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준비한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이사야입니다.

하나님이 세운 선지자이지요.

이사야가 하나님의 선지자로 세움을 받고 활동을 막 시작할 때,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역사 속에서 최대의 시련을 겪게 됩니다.

왜냐하면 신흥제국 앗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B.C.E 745년 즉위)이 근동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아주 강력한 정복 전쟁에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는 굴복 당했고, 남 유다 왕국은 그 장래가 불투명해졌습니다.

 

그 때 남 유다를 다스렸던 왕이 아하스입니다.

아하스 왕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 뿐이었습니다.

앗 시리아의 신하, 붕신의 예를 갖추고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결사항전 할 것인가?

안타까운 것은 아하스 왕이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나라 유다를 앗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에게 바치고 스스로 이방 나라 신하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하나님의 신하가 아니라 앗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의 신하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열왕기하 16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오늘 본문의 병행장)

거기에 보면 아하스 왕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씻을 수 없는 역사의 오점 두 가지를 남기게 됩니다.

그 첫 번째가 열왕기하1610-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6:10 아하스 왕이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더니

16:11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대로 모두 행하여 제사장 우리야가 제단을 만든지라

 

아하스 왕이 행한 첫 번째 악행은 앗 시리아의 왕이 섬기는 이방신전의 제단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설치한 것입니다.

악행 중에 악행, 만행 중에 만행지요.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일본 제국주의 시대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지 못하고 남산에 세운 신사 앞에서 참배를 했던 것처럼 아하스 왕도 앗시리아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앗 시리아의 왕이 섬기는 이방신전의 제단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설치해 두고 본인이 직접 나서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앗 시리아 왕에 대한 충성 맹세이지요.

 

아주 참담한 이야기지만 시사하는 바가 큰 말씀이라 좀 쉽게 번역된 새 번역 성경으로 12절부터 읽어 드리겠습니다.

16:12 왕은 다마스쿠스로부터 돌아와서, 그 제단을 보고 제단으로 나아가 그 위로 올라갔다.

16:13 그리고 거기에서 그가 직접 번제물과 곡식제물을 드렸고, '부어 드리는 제물'을 따르기도 하였다. 또 제단 위에 화목제물의 피도 뿌렸다.

16:14 그리고 그는 주님 앞에 놓여 있는 놋제단을 성전 앞에서 옮겼는데, 새 제단과 주님의 성전 사이에 있는 놋제단을 새 제단 북쪽에 갖다 놓았다.

16:15 아하스 왕은 우리야 제사장에게 명령하였다. "아침 번제물과 저녁 곡식예물, 왕의 번제물과 곡식예물, 또 이 땅의 모든 백성의 번제물과 곡식예물과 부어 드리는 예물을, 모두 이 큰 제단 위에서 드리도록 하고, 번제물과 희생제물의 모든 피를, 그 위에 뿌리시오. 그러나 그 놋제단은, 내가 주님께 여쭈어 볼 때에만 쓰겠소."

 

여기서 말하는 놋제단이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사용했던 여호와의 제단을 말하는데 그 놋제단을 치워버리고 바로 그 자리에 새 제단곧 앗 시리아의 왕이 섬기는 이방신전의 제단을 세워 놓고 제사를 그것도 매일 드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단절이지요.

이것이 아하스 왕이 행한 첫 번째 악행입니다.

 

아하스 왕이 행한 두 번째 악행, 1618절입니다.

16:18 또 안식일에 쓰기 위하여 성전에 건축한 낭실과 왕이 밖에서 들어가는 낭실을 앗수르 왕을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옮겨 세웠더라

새 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16:18 또 그는 앗시리아 왕에게 경의를 표하려고, 주님의 성전 안에 만들어 둔 왕의 안식일 전용 통로와 주님의 성전 바깥에 만든 전용 출입구를 모두 없애 버렸다.

 

오직 앗 시리아 왕에게만 경의를 표하겠다는 표시로 성전 안에 만들어 둔 왕의 안식일 전용 통로와 성전 바깥에 만든 백성들의 전용 출입구를 모두 없애 버립니다.

쉽게 설명하면 교회에 들어오는 출입문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것을 목격한 하나님의 선지자 이사야는 참담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하스 왕을 찾아야 하나님의 명령을 가감 없이 전달하게 됩니다.

그 때 전한 말씀이 오늘 본문 이사야 26장입니다.

아하스 왕에게 전한 하나님의 메시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역사를 지배하는 분은 하나님이다. 그러니 앗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26장입니다.

26:1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26:2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

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26:4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앗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이 우리의 반석 우리의 구원자(우리의 성벽과 외벽)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역사를 지배하시는 분 곧 만군의 주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제발 너희들이 닫아 놓았던 그 문들을(왕의 전용 통로, 출입구)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263절의 말씀처럼 이방인에게 빼앗겼던 예루살렘의 평강을 지켜내라는 것입니다.

예루’,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살렘샬롬이지요. 평화입니다.

합치면 예루살렘, 평화의 언덕이 됩니다.

그러니 제발 이름값 좀 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사야가 이 구원의 노래를 언제 불렀는지 아십니까?

앗 시리아의 힘이 절정에 달했을 때입니다.

앗 시리아의 힘이 쇠퇴하고 몰락할 때가 아니라 최고 정점을 찍었을 때입니다.

그 때 이사야는 앗 시리아의 몰락을 내다보고 유다의 구원을 노래합니다.

이사야 26:1절만 새 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26:1 그 날이 오면(하나님이 앗시리리아를 심판하는 날이 오면), 유다 땅에서 이런 노래를 부를 것이다. 우리의 성은 견고하다. 주님께서 친히 성벽과 방어벽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뢰, 믿음의 호연지기지요.

이사야는 그 믿음의 호연지기를 절망 속에서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믿음의 호연지기입니다. 세상과의 타협입니까?

 

절망의 시대, 두 번째로 이사야가 전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으로, 거짓에 굴복하지 않은 남은 자곧 의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계속해서 이어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거짓을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지자 이사야는 선포합니다.

유다 왕국은 심판은 피할 수 없다. 반듯이 망한다. 하지만 거짓에 굴복하지 않는 남은 자, 오늘 본문에서는 이러한 사람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 남은 자들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계속 이어간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희망을 상실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입니다.

어느 것 하나 정리 정돈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은 아모스 선지자의 말처럼 공의가 물처럼 흐르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는질서의 세상입니다.

그 세상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공의와 정의를 가로막는 세력이 영원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그분의 심판 날이 이르면, 공의와 정의를 가로막는 세력은 시편1266절의말씀처럼 지붕 위의 풀같이 말라 버리고 말 것’(129:6)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불의한 세상 앞에서 좀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노래하듯이 그리고 고백하듯이 그리고 기도하듯이 말합니다.

26:7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26:8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또 주를 기억하려고 우리 영혼이 사모하나이다

 

새 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26:7 주님, 주님께서는 의로운 사람의 길을 곧게 트이게 하십니다. 의로우신 주님, 주님께서는 의로운 사람의 길을 평탄하게 하십니다.

26:8 주님, 우리는 주님의 율법을 따르며, 주님께 우리의 희망을 걸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사모하고 주님을 기억하겠습니다.

 

저는 이 8절에 기록된 새 번역의 말씀 우리는 주님의 율법을 따르며, 주님께 우리의 희망을 걸겠습니다.’라는 이 이사야의 고백이 우리가 찾아야 할 길이며 우리가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제 자신에게 묻지요.

정말 그러한가?

 

의의 최후 승리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떠밀리며 흔들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 때 제가 붙잡는 말씀이 26:7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입니다.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길에서 벗어날 때도 있지만, 다시금 돌이켜 하나님의 일, 곧 공의와 정의를 이루는 일에 헌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26:7 말씀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입니다.

 

그러면 의인의 길 곧 남은자의 정직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9절 앞부분이 이것을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26:9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26:9 나의 영혼이 밤에 주님을 사모합니다. // 나의 마음이 주님을 간절하게 찾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이사야는 의인의 길 곧 정직을 버린 이들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26:10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26:11 여호와여 주의 손이 높이 들릴지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나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주의 대적들을 사르리이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도 의가 무엇인지, 옳은 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만한 자들과 악인들의 힘을 하나님이 어떻게 꺾으셨는지를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도 그 죄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처럼 가련하고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요.

의외로 이런 분들이 참 많습니다.

심판하려고 높이 들린 하나님의 팔을 보지 못합니다.

11절만 새 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26:11 주님, 주님께서 심판하시려고 팔을 높이 들어 올리셨으나, 주님의 대적은 그것을 모릅니다.

 

왜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이들은 악과 죄를 심판하려고 높이 들린 하나님의 팔을 보지 못할까요?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도 옳은 일 하는 것을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공의에 눈을 감은 탓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결론 12절과 13절이 중요한 것입니다.

26:12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

26:13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새 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26:12 주님,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가 성취한 모든 일은 모두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26:13 주 우리의 하나님, 이제까지는 주님 말고 다른 권세자들이 우리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우리가 오직 주님의 이름만을 기억하겠습니다.

 

오직 주님의 이름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분이 주시는 평화를 확신하십시오.

그러면 적어도 불의의 공모자, 불의의 친구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의(공의)를 배우십시오.

그리고 우리 앞에 놓인 의인의 길을 정직하게 걸으십시오.

그 길이 침묵이면 침묵으로 함성이면 함성으로 역사를 완성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걸으십시오.

이왕이면 우리 서로 서로가 의인의 길의 길동무가 되어서 서로 서로의 정직함을 보고 날마다 깨닫고 기쁨으로 그리고 평안으로 나갈 수 있는 축복의 역사가 주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